명창 유성준・이선유 기념관

기사입력 2023.10.05 17:15

SNS 공유하기

fa tw
  • ba
  • ka ks url
    안명영(전 하동고 교장)

     도로변 쇠기둥에 달린 ‘판소리 기념관’을 보고 길을 잡았다. 2004년 완공된 길이 34m의 중대교 앞에 섰다. 골짜기 물이 모여 물레방아 돌릴 위력이고 바위에 부딪쳐 천둥소리를 내며 물거품은 여울지건만 너럭바위는 예나지금이나 움쩍하지 않는다.

    다리 건너 오름길에서 오른쪽으로 수로 따라 가다 들 가운데로 가노라면 양면 주차가 가능한 넓은 길이 나온다. 저 멀리 병풍을 두른 듯한 산에 볼록볼록 봉우리 꿈틀거리고 아래 숲속에 기와집이 보인다. 담 벽에 밀착되게 입간판을 세웠다. 명창 유성준 이선유 판소리 기념관(名唱 劉成俊 李先有 板嗦哩 紀念館)이다.

    판소리는 조선 중기 이후 남도지방 특유의 곡조를 토대로 광대 1명이 고수 1명의 장단에 맞추어 일정한 내용을 육성과 몸짓을 곁들어 서너 시간에 걸쳐 노래를 부르는 민속예술형태의 한 갈래이다. 오랜 수련을 통하여 득음의 경지에 이르러야 제대로 부를 수 있기에 더욱 가치가 있다.

     대리석 주춧돌 위에 기둥을 얹어 누마루는 마당과 같은 높이이며 6칸 기와지붕 처마 밑에 획마다 끝이 아래 또는 위로 꿈틀거리는 칠성루(七星樓)를 새겨 걸었다. 안내인은 “뒤에 보이는 산이 북두칠성을 닮아 칠성봉이라 七星樓이 돠었지요. 하늘에 가까워 이 골짜기에 별을 단 사람이 많이 나온답니다. 별 세 개 김용순은 여기 출신이며 국회의원도 하였지요!” 전주 최씨로 대처로 나갔다가 고향으로 돌아와 기억을 더듬어 유성준의 무덤을 찾았으며 관리를 하고 있단다. 봉우리에서 뻗어 내려 전망이 좋은 곳에 터를 고르고 위로부터 기념관, 마당 좌우로 연수동 그리고 칠성루와 관리동이다.

    묘소로 안내한다. 기념관과 녹차밭 옆에 칠성봉과 직선상에 위치한다. 돌로 담장을 치고 비석을 세웠다. 〈국창 유성준 선생 추모비(國唱 劉成俊 先生 追募婢). 민족의 창극 판소리 명창 유성준(劉成俊) 공은 1873년 3월 27일 악양에서 아버지 강릉유씨 경학과 어머니 장덕옥의 장남으로 태어났다. 태조 이성계의 창업에 힘을 보태 개국공신에 오른 유창(劉敞)의 후손이다. 공은 13세 전남 구례에서 판소리 명창 송우룡의 가르침을 받아 동편제 판소리로 명성을 얻어 서울로 진출 장안을 누비며 소리가락으로 이름을 날렸다. 29세 참봉벼슬을 받아 국창(國唱)에 오른 공은 같은 해 극장 협률사에서 김창환 등과 함께 판소리로 무대를 주름잡아 인산인해를 이룬 관객들은 수궁가와 적벽가에 열광하였다. 이후 판소리를 민중 예술장르로 승화시킨 공의 소리에 고종황제와 대원군도 감동하였다. 송만갑 등과 함께 판소리 5대 명창에 꼽힌 공은 나라가 일제 지배를 받자 악양 진주 경주 순천 등지에서 활약, 김정문 임방울 강도근 박동지 정광수 박귀희 등 국가중요무형문화재 예능보유자를 길러냈다. 1949년 악양 상신대에서 향년 76세로 숨을 거둔 공은 시대적 신분의 벽을 뛰어넘어 민족 정서를 일깨운 위대한 예술인이었다. 하동 군민과 대한민국 판소리 동편제 명창기념사업회가 부지를 사들여 묘소를 단장하고 삼가 추모비를 세웁니다. 2010.5.〉

     기념관에는 각종 기록물과 판소리를 담은 레코드 등을 볼 수 있고 옆방에는 차 마시며 담소할 수 있다. 다른 하동의 명창을 소개하고 있다. 〈이선유(李善有)는 1873년 하동군 악양면 대대리(大垈里, 신대리로 추정)에서 태어났다. 10세부터 소리공부를 시작하여 15세 구례 송우룡(1835-1897)을 찾아가 3년을 공부하였다. 1902년 전북 순창 김세종에게 가르침을 받아 30세를 바라볼 나이에 판소리로 일가를 이루었다. 1908년부터 1910년 한일합방 전까지 송만갑협률사(宋萬甲協律社)에 참여해 전국적으로 순회공연을 다녔다 48세 악양면에서 진주시 영정(榮丁, 대안동)으로 이사하였다. 권번의 소리선생으로 활동하며 1930년 김수악에게 2년간 춘향가를 가르쳤다. 신숙 오비취 등에게 판소리를 사사하였다. 1949년 4월 진주시 장대동 자택에서 76세의 일기로 세상을 마쳤다.〉

     연수동은 크고 작은 장구 북 등이 비치되어 학생을 기다리고 있다. 칠성루에 오른다. 산마루로 둘러싸 병속에 들어온 듯하고 유난히 잘록한 부분이 있다. 보부상과 행인 들이 넘나들던 고개로 남명 조식이 악양동천을 찾았다가 돌아갔다 하여 회남재라 부른다. 지금은 청암호 물이 수월하게 터널로 넘어오고 있다. 눈앞에 형제봉은 펼쳐졌고 코밑에 사무동은 ’ㄱ’형의 팔작지붕이다. 두 처마 끝은 가까이 나란하다. 각각의 지붕에서 빗물을 홈에서 받는데 두 개의 홈을 연결하는 덮개는 수기와를 포개 볼록하면서 모양을 내고 있다. 대밭으로 새들이 날아들며 소리를 뽐내는 듯 ‘끼루륵~끼룩~’

    backward top home