젓가락 도시락

기사입력 2023.08.22 17:0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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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유 하

    19907월 짙은 안개 속에서 조업하던 100톤급 어선이 여수에서 기름을 싣고 부산으로 향하던 430톤급 유조선 선미 부분을 들이받아 약 150드럼의 벙커C유가 흘러나와 조류를 타고 남해안 섬 주변 바위들은 시꺼멓게 오염시키고 있었다.

    사고가 나자 사고해역 일대에 유화제를 살포하는 등 기름 제거 작업을 하였으나 확산 면적이 넓어 많은 사람이 기름 제거 작업에 참여했다.

    하동군에서도 실과별로 조를 짜서 순차적으로 기름제거 작업 지원에 나섰는데 산림과와 사회복지과가 한 조가 되어 참여하게 되었다.

    내일은 우리 과와 산림과에서 기름 제거 현장으로 가는 날이니 주무 계에서 도시락을 가지고 전 직원 작업복 차림으로 출근하라는 지시를 받았다.

    당시 필지가 도시락을 준비해야 했으나 깜빡하고 빈손으로 출근하고 보니 큰일 났다 싶었다. 30분 후 군청 버스로 출발하는데 빵이라도 사야 하나하고 잔머리를 굴리고 있을 때 산림과 직원으로부터 전화가 왔다.

    우리 과에서 두 사람이 도시락을 준비해 와서 많이 남는데 사회과에서 이웃돕기에 보내주면 좋겠다는 부탁 전화였다.

    그래 이 좋은 세상에 굶어 죽어라는 법은 없지하면서 속으로부터 터져 나오는 웃음을 참으며 의기양양하게 빈손으로 직원들 앞에 나섰다.

    손에 아무것도 없는 것을 본 직원들은 도시락은 어디 있냐고 물었다.

    원하는 대로 드실 수 있도록 준비했으니 걱정말라고 해 놓고 군청 버스가 노량 부둣가에 도착하자마자 부두 주변 가게로 달려가서 나무젓가락 한 다발을 사서 직원들에게 나누어 주었다.

    이게 오늘 점심이니 여기저기 다니시면서 맘껏 드시라고 하자 모두 놀라는 표정으로 장난이겠지 생각하며 웃었다.

    그러나 젓가락만 나눠주고 도시락을 나눠줄 기미가 보이지 않자 불안한 기운이 돌 무렵 산림과 여직원이 도시락을 가져와 맛있게 드십시오하면서 내려놓았다.

    같은 배를 타고 가는 한 팀은 직원 수보다 2배나 많은 도시락 준비했는데, 필자는 나무젓가락만 나누어 주었으니 지금 생각해도 웃기는 일이었다.

    그런데 더 웃기는 것은 산림과 직원이 필자에게 고맙다는 것이었다.

    지금 생각해 봐도 아찔한 순간이었고 황당한 이야기지만 세상사란 궁하면 통한다는 말이 딱 들어맞는 순간이었다.

    어느덧 30년이 더 지난 지금도 그때 같이 근무했던 동료들을 만나면 도시락 준비는 필자가 최고라고 웃으며 말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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