七왕자 머나먼 구도의 길(Ⅱ)

기사입력 2023.06.07 15: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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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안명영(전 하동고 교장)

    왕자는 기야산으로 들어간다. 칠불봉 아래에서 불도를 닦으며 수도하였다는 칠불암의 주춧돌은 여기저기 널려 있다. 정상에 자연석을 세우고 세로 글씨로 伽倻山/牛頭峰/상왕봉. 하단에 가로로 해발 1430m 陜川郡을 새겼다. 가야산, 우두봉, 합천군은 한자로 표기되었고 특이하게 牛頭峰 옆에 상왕봉을 나란히 적어 봉우리 하나에 이름이 두 개라는 것을 알게 한다.

    가야산은 조선 8경의 하나로 주봉 상왕봉(象王峯)을 중심으로 톱날 같은 두리봉, 남산, 비계산, 북두산 등 해발 1000m 넘는 고봉들이 이어졌고 그 복판에 해인사가 자리하고 있다.

    택리지에 가야산은 태백산맥과 소백산맥을 떠나 있으면서도 높고 수려함과 삼재(三災)가 들지 않는 영험함을 보이며 명산으로 불렸다.

    가야산(伽倻山)이란 명칭과 우두봉상왕봉의 유래.

    1. 옛날 가야국이 있던 이 지역에서 가장 높고 빼어난 산이었기 자연스럽게 가야의 산이 되었다.

    2. 부다가야(Buddhagaya) 인도의 비하르주 가야 구역의 도시이다. 석가모니가 보리수 나무 아래서 깨달은 장소로 유명하다. 인도 북동부 비하르(Bihar)주 가야(Gaya)시에서 11km 떨어진 곳에 있다. 탄생지 룸비니, 최초의 설법지 녹야원, 열반지 쿠시나가르와 함께 불교의 4대 성지이다. 부다가야 부근 부처의 주요 설법 처로 신성시되는 가야산에서 유래된다.

    3. 상왕봉의 象王열반경에서 모든 부처를 말하는 것이다. 정상부 모양이 소머리(牛頭)처럼 생겨 옛날부터 산정에서 행하여지는 산신제의 공물을 소로 바치고 신성시하여 왔다.

    왕자는 지리산 운장원에 들어간다. 허왕후는 아들들을 찾아갔지만 오빠 장유화상은 공부에 방해된다며 산문에서 돌려보낸다. 산중턱 임시 별궁에서 무작정 기다린다. 아들들을 만날 수 있다는 기별을 받고 미친 듯이 달려갔다. 왕비가 입었던 화려한 옷들은 가시덤불에 찢겨져 나가고 온몸에 둘렀던 값진 보석들은 모두 벗겨져 떨어져 내렸다. 허겁지겁 운상원 도착하였지만 아들들은 기척이 없었다. 그때였다.

    어머니, 연못을 보면 저희들을 만날 수 있습니다.”

    달빛이 교교한 못 속에는 황금빛 가사를 걸친 일곱 아들이 공중으로 올라가는 모습이 뚜렷이 나타났다. 이것이 아들과의 마지막 만남이었다. 허왕후의 아들들에 대한 그리움으로 검게 탄 가슴인 듯 바닥이 검은 영지(影池)에는 눈물인 듯 그득히 물이 고였다.

    석가모니는 인도 북쪽 네팔 국경 근처에 있던 카필라바스타에서 슈도다나 왕과 마야부인 사이에서 태어났다. 출산이 임박하자 친정으로 향했으나 룸비니 동산에 이르렀을 때 아들을 낳게 되었다. 마야부인은 산후병으로 7일 만에 세상을 뜨고, 석가모니는 세상의 부귀영화를 뿌리치고 29세에 출가하여 35세에 득도하였다. 그는 가장 먼저 어머니를 위하여 도리천으로 올라가 깨달음을 주고자 설법을 한다. “! 왕자는 무심타, 너무 무심하다.”

    지금도 칠불사 주변에는 왕자에 관련 지명이 남아있다. 수로왕이 머물렀다는 범왕이다. 범왕부락은 화개장터에서 십리 벚꽃길을 따라 쌍계사 앞을 지나 화개동천에 들어선다. 화개천 좌우 산이 밀착된 계곡 길을 오르다 보면 물이 크게 휘돌아 열린 공간이 나온다. 범왕천과 화개천이 만나는 지점이다. 길가에 계곡물에 씻기고 모래에 닳은 바위 돌에 신흥마을 별천지라고 알리고 있다.

    범왕천 따라 20리 지점 토끼봉 아래에 시장이 섰다는 저자골과 허왕후 임시 거처를 천비촌, 해가 어름어름 지던 어느 저녁녘에 도착한 장소를 어름골이라 불리고 있다.

    중국에 공인된 불교 전래는 후한 명제 영평 10(67)이다. 어느 날 밤에 금인이 서방으로부터 방광을 하면서 왕궁에 하강하는 꿈을 꾸고 서방에 불교가 있음을 알고 채음, 진경 등 18명을 인도에 파견하여 불교를 알아보게 하였다. 그들은 중도에서 백마에 불상을 실은 섭마등과 축법란을 만나 중국으로 갈 것을 권유하여 동행한다. 섭마등은 불교를 알리려는 강한 염원으로 고생을 무릅쓰고 사막을 건너 낙양에 도착했다. 명제는 낙양문 밖에 백마사를 짓고 그곳에 거주케 하였다. 이것이 중국에 사문(寺門)이 들어온 시초이다. 인도에서 불교가 발생하고 약 500년이 지난 후였다.

     

     

    물은 낮은 곳으로 흐르듯 한반도에 불교는 흘러들어왔다. 인도에서 중국으로 그리고 오로지 중국에서 한반도로 전래 되었겠는가! 산악 길 보다 해류를 알고 계절풍을 이용하면 선박으로 이동이 용이하다. 한반도 불교전래를 다양하게 파악하는 것이 필요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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