남평 윤주석 선생(2) 안명영(전 하동고 교장)

기사입력 2022.02.23 22: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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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남평 윤주석 선생(2) 

    안명영(전 하동고 교장)

     풀리지 않는 유명조선국(有明朝鮮國)을 머리에 담고 무거워진 몸으로 내삼문을 내려온다. 담장 밖 충렬사 나이만큼의 느티나무 가지 사이로 남해대교는 모습을 보여준다. 외삼문을 나와 한글 비문을 담은 비석을 또 한 번 보고 충렬사관리사에 들어섰다. 

    “드물게 한글 비문을 보았습니다.”

    “아, 그 비석 말이군요. 1948년 남해군민과 경남 초등학생들이 모은 성금으로 세웠습니다. 《조선사연구》의 저자 정인보가 짓고 한글비문 선구자 김충현의 필체입니다. 읽을 수 있어야 의미가 살아나지 않겠습니까.”

     한글로 새겨 성금을 냈던 초등학생들이 읽고 고개를 끄떡였겠구나.

     70세 넘은 문화해설사는 지도를 펼치고 손가락으로 짚으며 설명한다.

     남해의 지형은 의자에 앉은 어머니가 아이를 무릎에 앉히고 내려다보는 모습이다. 머리와 목은 설천면과 고현면이고 굽은 등은 서면, 남해읍은 가슴, 남면은 의자에 해당된다. 무릎은 상주・삼동・미조면이고 아기는 창선면이다. 남해사람들을 만날수록 포근하며 애향심이 넘쳐나는지 이제야 알겠다. 

     어머니 무릎 윗부분이 잘록하다. 이곳에 대하여 전해오는 이야기가 있다. 두곡 월포 인근 꼭두방에 비가 유난히 많아 오는 밤이면 꾀꼬리가 많이 울어 눈물이 강을 이뤘다. 또는 파도가 좁은 만으로 밀려와 겹치면서 바위에 부딪치는 소리가 꾀꼬리 우는 소리와 흡사하다 하여 앵강(鶯江)이라 불린다.

     친절하고 자상한 문화해설사는 내미는 명함을 찬찬히 보고는, 

    “하동고에 근무하였군요. 설천 고개에 가면 하동과 깊은 인연을 맺은 사람의 비석을 볼 수 있을 겁니다.”

     노량바다를 왼쪽에 두고 포구로 접어든다. 드문드문 낚싯대를 치켜 올리는 태공을 곁 눈길하며 핸들을 꽉 잡는다. 해변 길과 산길의 길목에 긴 돌을 세우고 ‘왕지’라고 새겼다.

     노란 중앙선이 보이는 산길로 접어들었다. 경사가 심하고 급커브 길이라 조마조마하다. 마주 오는 차량이 중앙선을 침범하는 듯하다. 손에 땀이 흥건한 시간이 지나자 전망 좋은 공터가 나오고 로타리공원이다. 한가운데 스틸파이프를 촘촘히 세워 분수를 나타내고 그 위에 30톤의 자연석을 얹었다. 거대한 돌을 떠 올리는 물의 힘은 남해인의 끈기와 근면정신을 상징한단다. 

     금오산이 보이는 곳에 대리석 기단 위에 돌을 얹고 ‘독립지사 南平 尹柱石 先生의 碑’를 고려대학교 교우회가 세웠다(2007.9.30)

     뒷면에 선생의 연보를 소개하기를, 

     1889 남해군 설천면 문의리 왕지 출생, 1912~1915 보성전문학교(고려대학교) 졸업, 1916~1920 백산무역(주) 서기로 상해임시정부에 독립자금 송금 경리총책과 연통제망 구축 주관. 1920~1927 경남은행 하동지점 서기로 어음활인 등 독립자금 송금, 1928~1945 섬강춘작(蟾江春酌) 등 한시작(漢詩作) 회동 후 밀회 주관 및 하동 향교활동 통한 독립정신 고취, 1947.12~1949.3 하동향교 장의(掌議 ; 성균관). 1947.11~1949.3 하동중학교 창설기성회 사무국장, 1949.9~1953.3 남해 설천・삼동초등학교장, 1953.6.27~1954.3.6 하동고 교장 근무 및 순직(학교장), 문의리 구두산 참샘골 영면.

     윤주석 선생은 남해에서 태어나 하동에서 26년 9개월 동안 의미 있는 활동을 하다 65세에 생을 마감하고 하동고 학교장으로 고향 산하에 묻혔다. 

     고개 넘어 설천초등학교는 1920.10.5 사립양명보통학교로 창립하였다. 중앙 현관에 개교 100주년 기념사업으로 역대 졸업사진을 나열하였다. 윤주석 교장은 11대(1949.9.3~1952.9.15)이며 졸업생 기수는 26회 27회 28회이다. 사진 앞줄 가운데 키 크고 미남의 신사가 윤교장으로 보인다. 

     설천(雪川)을 눈냇골이 어울린다고 웅얼거리며 로타리공원을 지나 ‘왕지’ 이정표를 돌아 해변 길 따라 가다 세운돌에 마을 유래를 읽는다.

     고려말 이성계가 남해 금산에서 백일기도를 마치고 개성으로 가는 길에 마을 앞바다를 보니 연못 같은 바다에서 광채가 나고 기운이 왕성함에 감탄하였는데 그 기운을 받아 임금이 되었다 하여 빛날 왕(旺)자에 못 지(池)를 넣어 旺池라 이름 하였다.

     남평 윤주석 선생은 하동중 창설에 큰 역할을 하였고 생애 마지막 9개월은 초창기의 하동고 교장으로 학교 발전에 크게 기여하였다. 

     하동교육발전에 이바지한 공적을 돌에 새겨 길이 이어지도록 하여야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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