궁항리 양이터 안명영(전 하동고 교장)

기사입력 2021.12.18 18:2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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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궁항리 양이터

     

    안명영(전 하동고 교장)  

     

     옥종농협 앞마당에 새롭게 단장된 비각이 있다. 네 개의 기둥이 받치고 지붕에 기와를 얹었다. 서까래, 도리 등을 도색하고 좌우로 널빤지를 가지런히 겹쳐 비바람을 막을 수 있겠다. 

     처마 밑에 품위 있는 예서체로 충렬려(忠烈閭)의 현판이 있다. 

     기둥 사이에 붉은 색의 나무 창살을 세웠고 비각 안에 세월을 머금은 비석이 있다. 앞면에 동몽교관금부도사행○○찰방재령이번처절부숙인장수황씨지려(童蒙敎官禁府都事行○○察訪載寧李蕃妻節婦淑人長水黃氏之閭)로 새겼고 뒷면 글자는 판독이 어렵다.

     비각 오른쪽에 세운 비는 ‘남계이선생배숙인장수황씨충렬려11세손 鉉宅鉉春중건기념비’로 새겼다.

     뒷면 비문은 별도 오석에 새겼다. 

    절부는 재령이씨 남계 이번의 아내이고 장수황씨 숙(俶)의 따님이니 세종 때 명재상으로 알려진 황희 정승의 8세손이다. 계사년(1593) 6월 말 왜적이 진주를 함락하고 다음달 6일에 악양으로 부터 묵계로 들어왔다. 이때 절부가 수풀 밑에 피해 숨어 있다가 왜적에게 사로잡히게 되었는데 왜적이 칼을 들이대고 위협하는 것이었다. 

     절부는 “속히 나를 죽여라, 차라리 죽을지언정 너희들을 따르지는 않으리라”하니 왜적이 마침내 칼로 찔러 죽였다. 아 슬프다! 당시 명색이 사족의 부녀로서 다(多) 왜적을 만나서 사로잡히어 욕을 당하지 않은 사람이 드물었는데, 절부만은 흰 칼날을 무릅쓰고 청절을 세웠으니 참으로 열부에 부끄러움이 없도다. 이 광경을 지켜본 경상도사 하수일은 후에 <애황부>란 시를 지어 널리 세상에 알려 정려를 받게 하였다. 그곳을 오늘날 ‘양이(梁李)터’라고 불린다. 

     황절부가 왜적의 칼날에 순절한 후 1597년 정유재란이 일어나자 남편인 남계공은 분연히 창의하여 화왕산성 전투에 참여하였고 남계공의 부친인 진사 이희만은 백의종군하던 충무공 이순신이 굴동(屈洞: 청룡)을 거쳐 갈 때 자기 집에서 유숙하게 하여 정개산성의 방어에 일익을 담당하도록 하였으니 충절의 정신이 가득 찬 집안이었으며, 그 혼이 오늘에 이어져 이곳이 충절의 고향이라는 긍지를 갖게 하고 있다. 梁李터는 어디 있을까! 

    조선왕조실록 선조 26년(1593). 6월 29일 함락된 진주성 싸움의 자세한 경과를 기록하기를, 

     적이 본성을 무찔러 평지를 만들었는데 성 안에 죽은 자가 6만여 인이었다. 성이 함락된 뒤 적은 군대를 몇 기(起)로 나누어 1기는 단성·산음을 향해 출발하여 지리산으로 들어가고, 1기는 진주 서면으로 나아가서 지리산으로 간 적과 합세하여 구례·광양·남원·순천 등지로 흩어져 들어가서 마을을 노략질하였다. 이 과정에서 하동읍성은 불태워졌는데 읍성은 남해와 내륙을 연결하는 전략적 요충지로 수군은 바다와 민관승군은 금오산을 중심으로 활동 중이라 일본군은 오래 머물지 못했다. 이순신은 백의종군길에 성내 별사에서 1597년 5월 28~29일을 유숙한 것에서 알 수 있다.

     항(項)자는 사람의 목 부위를 뜻하는 글자이므로 궁항리(弓項里) 지형은 활 목의 형태이며 안몰 마을 앞에 활촉산이라는 지명이 뒷받침하고 있다. 북쪽으로 지리산 삼신봉에서 뻗어 나와 재산을 거쳐 주산으로 이어진 산줄기가 병풍처럼 펼쳐져 있고, 주산 남쪽 비탈면에 궁항이 자리 잡고 있다. 

     대나무가 무성한 양이터는 궁항리 맞은편에 있다. 지리산 둘레길의 위태와 하동호 구간을 걸으면 양이터를 지나 양이터재에 오르면 하동호가 보이고 본촌마을에서 새 길 따라가면 하동호관리사무소에 이르게 된다. 

     궁황리 오씨 노인은 예부터 이곳은 산이 깊고 물이 맑아 사람살기 편안한 곳이다. 특히 땅의 생명력이 충만하여 나쁜 기운이 들어오지 못하는 청학동이 근처에 있어 그곳으로 피난 왔다가 마을을 이루기도 하였다. 

     양이터 마을은 한때 20~30가구가 살았으며 현재 3가구로 2가구는 가끔 거처하며 유일하게 李氏가 거주하고, 최근에 윗마을에 3가구가 유입했다고 한다. 컴컴한 대나무 숲 속에 들어가자 서너 채 집들이 옹기종기 모여 있고 댓잎끼리 비벼대는 소리만 남기고 한줄기 바람이 지나가고 있구나!

     왜적이 절부 황씨를 칼로 찔러 죽인 장소를 양이터라 불리고 있다. 옥종 재령이씨 주최로 황절부의 정절을 담은 표지석을 세워 둘레길 걷는 이 메모하고 기억하는 장소가 되도록 하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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