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미쉬빌리지, 청학동마을, 생태마을

기사입력 2009.05.07 16:12

SNS 공유하기

fa tw
  • ba
  • ka ks url
    이현도 (논설위원, 언어학박사)
    미국 펜실베니아주에 아미쉬빌리지라는 곳이 있다. 아미쉬인들이 사는 마을이다. 이들은 16세기 유럽에서 일어난 다양한 종교개혁운동 중 한 갈래로 재세례운동에 뿌리를 둔 기독교 종교공동체이다.
    아미쉬란 재세례운동파의 목사 야콥 암만(Jakob Amman)의 이름에서 유래한다. 암만은 매우 엄격한 개혁을 주장하다 1693년 다른 재세례파 교인들에 의해 파면당한 목사이다. 아미쉬는 암만을 추종하는 종파이다. 일테면 암만주의자다.
    아미쉬 빌리지의 아미쉬인들은 독일, 스위스, 프랑스 알사스 지방에 살던 독일어권 사람들로, 이 지역에서 심한 종교적 박해를 피해 미국으로 이주해 왔다.
    아미쉬인은 태어났을 때 하는 유아세례를 믿지 않는다. 16세에서 18세 사이의 청소년기에 다시 세례를 하는 종교적 전통을 지켜오고 있다. 그래서 재세례파이다. 이들은 종교적 전통 뿐 아니라 라이프스타일 조차 16세기의 전통을 고수하려 하고 있다.
    아미쉬인은 가정에서 여전히 '펜실베이니아 독일어'라 불리는 독일 사투리로 말한다. 원 고향이 독일어권 지역이기 때문이다. 아미쉬라는 이름의 첫 글자 A의 발음도 영어처럼 [ei]로 발음하는 것이 아니라 독일어 발음 [a:]로 발음한다. 또 자기들을 아미쉬라고 부르는 반면 자기 외의 미국인들을 16세기에 그렇게 불렀던 것처럼 아직도 ‘영국인(English)’이라고 부른다. 이들의 교통수단은 마차이거나 1940년대에나 있었던 발자전거이다. 전기대신에 촛불을 켜고 살며 집에 전화나 TV가 없다. 그리고 신문도 보지 않는다. 가급적 세속적인 문명에는 차단하고자 한다. 아미쉬 남자들은 유럽의 전통적인 검은색 옷차림을 하고 재킷에 단추나 접는 깃이라든가 지퍼를 달지 않는다. 남자들은 긴 구렛나루 수염을 자르지 않고, 여자는 미사포같은 두건을 쓰고 다닌다.
    아미쉬마을에는 세계 각국의 많은 관광객이 찾아오고 있다. 관광객들이 이 마을을 찾는 이유는 특별한 볼거리가 있어서가 아니다. 이들의 반문명적인 삶과 자연과 더불어 사는 삶과 도덕적인 삶을 보기 위해서 오는 것이다. 아미쉬인들은 세상에서 가장 참된 노동은 농사에 있다고 본다. 농사야말로 가장 생산적인 일이며 가장 주체적인 일이라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아미쉬인들이 생산한 농산물은 관광객에게 인기가 좋다.
    아미쉬빌리지를 장황하게 소개하는 이유는 마을형성과 구성원에 있어서 우리고장 하동의 청학동 마을과 비교되기 때문이다. 청학동은 하동군 청암면 묵계리 학동의 윗 동네인 진주암터에 ‘갱정유도(更定儒道)’라는 종교공동체가 자리잡으면서 이름을 얻게 된 마을이다. 갱정유도는 1945년 강대성이(姜大成)이 창교한 종교로, 유·불·선에 근거하고 동·서학을 합일하되 그를 다시 유도(儒道)로 구세(救世)한다는 교리를 갖고 있다. 갱전유도의 신자들은 매일 새벽 4시에 일어나 영선도인법(?仙導引法)을 행한 뒤 두발을 손질하며 선당궁(仙堂宮) 앞에서 치성을 올리고 신인합일(神人合一)을 빌며 지상천국의 도래를 염원한다.
    이들이 의식에서나 일상생활에서 입는 의복은 전통한복이다. 성인 남자는 갓과 망건을 쓰고 여자는 곱게 빗질한 머리에 비녀를 꽂고 다닌다. 아이들이나 청소년들은 두발을 길게 하고 있다.
    청학동 마을과 아미쉬빌리지는 자신들의 종교적 신념을 세속으로부터 지키기 위해 마을공동체를 이루며 옛 전통을 지키고 있다는 점에서 일치한다.
    그러나 두 마을이 서로 다른 중요한 면이 있다. 아미쉬인들에게는 500년 전 그들의 조상이 그랬던 것처럼 여전히 농업이 주업이므로 마을 풍경이 크게 변한 게 없다. 반면 청학동은 많이 변했다. 청학동에는 식당이나 서당 등 집들이 많아졌다. 아미쉬 마을처럼 전원적이거나 목가적이지 않다. 세월이 갈수록 깊은 산 속의 맛을 잃어가고 있다. 
    내가 살고 있는 마을이 산림청에서 지정한 생태마을이 됐다. 생태마을은 정부로부터 경제적 지원을 많이 받게 되어 있다. 마을로 봐서는 경제적 자원을 통해 마을의 가치를 한 단계 업그레이드시킬 수 있는 기회가 온 것이다. 큰 경사가 아닐 수 없다. 생태마을이 되기까지 동네 이장과 청년들 그리고 이웃동네의 이장까지 애를 많이 썼다. 무엇보다 이 동네의 어르신들이나 선조들이 자연을 거스르지 않고 지켜온 동네의 아름다운 풍광이 가장 크게 기여를 했다고 본다. 나는 생태란 낱말을 생물적이며 자연친화적인 것으로 해석하고 생태마을은 사람들이 생태적인 삶을 하고 있는 마을로 이해하고 있는데, 우리 마을에 앞서 이루어진 생태마을들을 보면 그렇지만도 않은 것 같다.
    생태마을에도 ‘개발위원회’라는 것이 있는 것을 보면 생태를 보전차원이 아니라 ‘개발’이라는 개념으로 접근하고 있다는 점이 안타깝다.
    도시의 발전방향과 역행하며 조상이 물려준 자연환경을 온전하게 보전하고 생태적 생산을 하고 생태적 삶을 추구하는 사람들이 사는 마을이 됨으로써 가치를 이끌어내는 것. 또 이 가치가 고귀한 관광적 자원이라는 사실을 인식하는 것이 생태마을이 추구해야할 방향이라고 생각한다.
    backward top home