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참판댁 대청마루에서 밀려난 ‘뒤주’

기사입력 2009.04.30 15:4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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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하아무/소설가, 동화작가

    최참판댁 안채에서 행랑채로 가려면 중간채를 지나야 한다. 안채나 사랑채 넓은 대청마루에 앉아 있는 것보다 행랑채 좁은 마루에 엉덩이를 걸치고 있는 게 더 편하다. 나도 모르게 행랑채에 가 앉게 된다.
    “그래도 자네는 뼈대 있는 양반가의 자손이 아닌가?”
    중간채 뒤편에 있던 뒤주가 내게 말을 건다.
    “그거야 할아버지의 할아버지 때 이야기 아닌가. 나한테야 기억에도 없는 호랭이 담배 먹던 때 일인걸 뭐.”
    “아무리 그래도 피는 속이지 못하는 법. 양반의 피를 받은 자네가 비루먹은 강생이처럼 행랑채에서 비비적거리는 걸 조상님들이 보면 뭐라 하시겠나.”
    “그런 말 마시게. 남명 조식 선생도 일찍이 ‘한미한 사람이 이루기 힘든 공 좋아하는 게 가장 가엾다(最憐寒族愛難功)’ 했나니, 난 조상 운운하면서 난체하고 싶은 마음 전혀 없다네.”
    “하기야 제 분수도 모르고 교육 관계자들 젖혀둔 채, 마치 교육 문제를 제가 다 해결할 듯이 나대는 사람을 보면 그런 생각이 들기도 하지.”

    ‘뒤주 밑이 긁히면 밥맛이 더 난다’

    그런데 보고 있자니 뒤주의 모양새도 퍽이나 쓸쓸해 보인다.
    “그나저나…, 내가 여기 행랑채에 나앉은 것도 그렇지만 자네도 제 자리를 찾지 못하고 쫓겨난 것 같은데.”
    “허, 그러고 보니 그도 그렇네. 사돈 남 말한 셈이군 그려.”
    “뒤주라 하면 항용 대청마루에 떡하니 자리잡는 게 보통 아닌가.”
    “보통은 그렇지….”
    “더군다나 최참판댁과 같은 부잣집 같으면 한 집안의 식량을 갈무리하는 가구로서의 듬직하고 위엄도 있지 않은가. 그래서 광의 열쇠와 함께 뒤주 열쇠는 집안의 경제권을 상징했거늘.”
    “하아, 나도 내가 이리 될 줄 꿈에도 몰랐다네.”
    “중간채로 밀려난 이유가 뭔가?”
    “요즘 뒤주를 쓰는 데가 없지 않은가. 부피도 크고 무겁고….”
    “그야 그렇지. 쓰임새가 줄거나 없어진 물건이 자네 말고도 많지. 사람도 마찬가지고….”
    “그래, 그렇게 직장에서 밀려나는 가장들이 많다는 얘긴 들었네.”
    “요즘 젊은이들은 밀려나기도 전에 들어가 보지도 못하고 겉돌기도 한다네.”
    “안타까운 일이지. ‘뒤주 밑이 긁히면 밥맛이 더 난다’고, 뒤주 바닥을 긁어 밥을 지으면 사람에 비해 밥이 턱없이 모자랄 테니 더 귀할 수밖에 없는 것처럼, 지금 형국이 딱 그 짝일세.”
    “그래, ‘돈 떨어지자 입맛 난다’는 속담도 있지. 아무리 긁어 모아봐야 일자리는 턱없이 모자라고, 딱한 노릇일세.”
    “나 역시 마찬가질세. 내가 뒤주지만 뒤주 노릇만 하겠다고 고집을 피울 수가 없었네.”
    “보통 가정에서야 그렇다 쳐도 여긴 최참판댁이 아닌가. 사람이 상주하는 집이 아니라 관광지이니, 자네가 뒤주 노릇은 아니 하더라도 뒤주 본래의 자리에서 본연의 쓰임새를 일깨워주는 역할쯤은 해야지 않는가 싶네만.”
    “자네 말도 백 번, 천 번 맞는 말이네.”
    “헌데?”
    “부잣집에는 나 같은 대청마루 뒤주 말고도 뒤주가 많다네. 한데뒤주라 해서 벼 수십 가마가 들어가는 뒤주도 있고, 광 속의 대형 뒤주도 여럿 있다네.”
    “뒤주는 많은데 자리는 한정이란 말인감?”
    “꼭 그런 것은 아니지만….”
    “그럼?”
    “이 일을 할 물건이 나밖에 없었다고나 할까….”
    “무슨 일?”
    “허어, 좀 낯뜨겁기는 해도, 뭐, 기왕 말 꺼낸 것, 까짓 것 말해 버리지 뭐.”

    “나에게도 희망은 있다”

    “뭔데 그리 비장한가?”
    “에어컨 실외기!”
    나는 그제야 뒤주에게 다가가 자세히 살펴보았다. 뒤주는 중간채에 자리한 안내소의 에어컨 실외기를 가리고 있었다.
    “한옥에 에어컨 실외기가 드러나 있으면 보기 싫잖나. 그래서 궁여지책으로 내가 나선 것이지.”
    “그랬군, 몰랐네.”
    “그렇게 딱한 표정으로 보지 말게나. 그래도 난 내가 할 수 있는 일을 찾은 게 얼마나 다행스러운지 모른다네.”
    “아무리 자네가 그래도 딱한 건 딱한 일일세.”
    “그러지 말게나. 난 나대로 희망을 가지고 살아가니까.”
    “뭔 희망?”
    “다시 내 본연의 역할을 되찾게 될 희망.”
    “저 실외기가 있는 한 어려울 것 같은데?”
    “자네가 내 꿈을 깨뜨려서 얻는 게 뭔가?”
    “없지.”
    “그럼 내 꿈을 그대로 두게. 자네가 자네 꿈을 간직하고 있는 것처럼.”
    “그러지.”
    “그리고 한 번씩 사람들에게 내가 본래 여기에서 실외기를 가리는 물건이 아니라는 사실만 일깨워주기 바라네. 잊혀진다는 게 얼마나 외롭고 고통스러운지 잘 알지 않는가.”
    “알겠네. 내 자네 말대로 함세. 염려 말게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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