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지나치게…‘선생님 신문사에 억울한 사연을 보내면 될까요?’ 순하디순한 그녀가 어느 아침 나에게 문자를 보냈다. 그날은 종일 상담일로 출근하는 기관에 있어서 전화를 할 시간이 없었다. 50대 중반인 그녀는 조선족 결혼이민자이다. 그녀는 말이 좀 많은 편이어서 한가할 때가 아니면 전화를 하기가 곤란하였다. 그 날 나는 그녀에게 내어 줄 시간이 없었다. 위로를 줄 만한 가까운 지인에게 연락을 하여 부탁을 하였다. 그녀의 억울한 사연을 들어주고 위로해 줄 사람이 필요했다. 다행히 그 사람은 그녀에게 전화를 하였고 나에게 문자도 주었다. ‘선생님 방금 1시간 반 동안 통화했네요. 언제 선생님 시간이 될 때 전화 한 번 주셔서 전문가로서 상처 입은 그 마음을 좀 어루만져주시면 좋겠습니다.’ 가족센터의 상담사에게 다시 연락을 하고 상황을 간단하게 설명한 뒤 방문해 줄 것을 부탁드렸다. 퇴근길에 나는 그녀의 사정을 대강 들어 알게 되었다. 면사무소에서 공공근로를 하고 있던 그녀는 여러 가지 억울한 일들을 경험하게 되었나보다. 정직하고 순진한 그녀는 무슨 일이든 지나치게 열심히 하는 사람이다. 요양보호사 일을 할 대도 대상자들은 그녀만 찾았다. 그러나 같은 일을 하는 주변 사람들에게 그녀는 불편한 존재이다. 지나치게 열심히 일을 하는 그녀가 쉬엄쉬엄 시간만 보내고 싶은 사람들에게는 부담이 될 수도 있겠구나 싶다. 교통사고로 누워있는 남편과 자신의 사고까지 겹쳐 그녀는 살고 싶지 않다고 한다. 남편도 지나치게 조용하고 순한 사람이다. 아들도 이런 어머니조차 강해서 무섭다고 한단다. 누구 하나 자신에게 힘이 되어 줄 사람이 없어 그녀는 막막해한다. 그나마 다행인 것은 친정 식구들 대부분이 한국에 나와서 살고 있다는 점이다. 그러나 시골에 살고 있는 그녀는 도시에 살고 있는 오빠나 언니 집에 가는 일도 내키지 않는단다. 잠시 다녀올 수는 있겠지만 시골 내 집처럼 편안하지도 않고 도시에서 살아갈 자신도 없다고 한다. 면사무소 담당자에게 서운하고 억울한 일이 많아 호소하고 싶다고 한다. 일하는 시간에 병원도 가고, 개인 볼 일도 보는 사람들과 달리 그녀는 점심시간에 병원도 다녀오고, 개인적인 볼 일도 보는데 오히려 자신에게 더 많은 원망이 돌아온다는 것이다. 이런 경우 뭐라고 답해 주어야 할까 잠시 망설여진다. 그녀의 순진함에 대하여, 지나친 성실함에 대하여 탓을 해야 할까. 왜 다른 사람들과 같이 적당하게 시간을 보내지 않고 열심히 하냐고 나무래야 할까. 삼십 년 가까이를 이 지역에서 살면서 늙어 가는데도 그녀는 여기 사람들과 발걸음이 다르다. 내 것이라고 챙기기보다 이웃과 나누면서 살았다. 가진 게 특별히 많은 것도 아니지만 농사를 많이 짓던 젊은 시절엔 푸성귀라도 나누면서 살았고, 이웃 어른들을 보살펴 가며 살았다. 그런 그녀에게 돌아오는 건 고작 순진함과 어리석음에 대한 비웃음이다. 주말에 시간을 내어 그녀와 1시간 반 정도 통화를 했다. 울먹거리며 두서도 없이 이야기를 쏟아내는 그녀에게 위기가 온 것 같다. 살고 싶지 않다는 말이 중간마다 튀어나와 안쓰럽다. 이 나이에 이런 마음으로 살아가는 사람도 있구나 싶다. 그 억울함을 누그러뜨려 다시 살아갈 수 있는 힘을 주려면 어떻게 해야 하나 여러 가지를 궁리해본다. 아이처럼 달래도 보고, 세상 사람들을 같이 원망도 해주고, 지나치게 열심히 하지 말라고 이야기를 하면서 스스로 의아해 하기도 한다. 무엇이 옳은 일일까 나도 궁금하다. 자신이 맡은 일을 열심히 하는 것이 잘못된 일일까, 지나치게 열심히 일하는 것은 같이 일하고 있는 사람들에게 원망을 들어도 될 일일까, ‘오늘부터 당신은 지나치게 열심히 일 하는 것을 삼가 주세요.’ 라고 말해줘야 할까. 이런 저런 생각으로 마음이 추워오는데 밖의 날씨도 엄청 춥다. 겨울의 한복판인가보다.
-
금오산(Ⅰ)이름은 다른 것과 구별하기 위하여 사물 단체 현상 따위에 붙여서 부르는 말이다. 산은 모양이나 전해 오는 이야기를 바탕으로 불리기도 한다. 금남・진교・고전면에 걸쳐 솟은 산으로 바다와 육지를 두루 조망할 수 있어 일찍이 소오산이라 하였다. 소리와 문자로 정보가 전달되던 시대에서 빛 속도로 전파되는 인터넷 시대에서 ‘금오산’으로 널리 퍼지고 있다. 소오산으로 알아 오던 세대가 금오산으로 전환되기에는 상당한 시간이 필요할 것이다. 그 예로써 학창시절에 필수 시험출제 항목으로서 지식의 공간을 차지하고 있는 금오신화(金鰲新話)를 들 수 있겠다. “우리나라 최초의 한문 소설은?” “금오신화입니다!” “작자는 누구일까요?” “김시습 입니다!” 질문자는 보충 설명으로 마무리한다. 김시습(金時習)은 신동이라고 소문났다. 3세에 “복숭아는 붉고 버들은 푸르니 봄이 저무는구나/푸른 바늘로 구슬을 꿰니 솔잎 이슬이로다(桃紅柳綠三春暮/珠貫靑針松葉露)”라고 읊었다. 솔잎을 푸른 바늘로 맺힌 이슬을 영롱한 구슬로 보는 동심의 눈을 가졌기에 표현할 수 있었다. 재상 허조는 찾아와 “얘야, ‘老’자를 넣어 시 한수 지어 보아라!” 그 자리에서 ‘노목개화심불로(老木開花心不老, 늙은 나무에 꽃이 피었으니 마음은 늙지 않았네)’. 세종은 김시습을 궁중으로 데려와 관리들을 시켜 재능을 시험해 보게 하였다. 시험관의 무릎 위에 앉아 즉석에서 몇 수를 지어 보였다. 세종은 감탄하여 비단 50필을 하사하며 후일을 기약하였다. 이로부터 ‘오세문장(五歲文章)’이라는 칭호를 받아 사람의 선망의 대상이 되었다. 아 어찌하랴! 21세에 수양대군이 단종을 몰아내고 왕위를 찬탈했다는 소식에 책을 불사르고 설잠이라는 법호로 세상을 떠돌았다. 가는 곳마다 시를 써서 바람에 흩날리는 등 기행을 일삼는다. 그는 경주 금오산(金鰲山) 용장사에 은거하면서 금오신화를 지었는데 금오산은 김시습을 연상하게 된다. 49세에 부여 무량사에 들어와 59세로 생을 마감한다. 금오산을 허용하는 마음으로 케이블카에 도전한다. 조심스럽게 발을 넣는다. 철탑이 나열되었고 좌우로 캐빈이 내려오고 올라간다. 걸어 올라간다는 것은 생각하기도 아찔하다. 점점 바다가 아래로 깔리고 주변 봉우리는 낮아지고 고개를 숙이자 하얀 아크릴이 돌너덜에 닿을 듯하다. 골짜기에 온통 그만그만한 회색 돌들이 겹겹이 쌓였는데 우리나라 지도 모양이며 중앙을 세로로 지나고 있다. 스르르 정류장에 도달하자 천장에 겹겹이 지름의 크기 다른 바퀴가 수평으로 돌면서 내리는 사람 타는 사람을 분류한다. 전망대로 올라간다. 안개가 걷히면서 비경을 보여준다. 바로 아래 논이 끝나고 방풍림으로 조성된 숲에서 물살이 빨라 싱싱한 고기로 낮에서 밤까지 손맛을 볼 수 있다는 ‘해와 달 낚시공원’, 중평항, 망운산, 님해대교와 노량대교, 하동화력 발전, 이순신 장군의 최후 격전지 노량 앞바다 한복판에 옹기종기 섬들이 모여 있고 그중에 가장 큰 섬이라 대도(大島)이다. 정상에는 높은 철탑에 낙지의 빨판 같은 기구가 달렸는데 천상과 지상의 전파를 받아서 내보내는 현대식 봉수대이다. 옆에는 산봉우리를 달고 하늘로 날아오를 듯 대형구의 구조물이 있다. 만져 보고 들여다보고 싶지만 출입금지이다. 철조망 아래 삼각형의 바위를 앉히고 金鰲山(금오산), 金南(금남), 소오산이라 새겼다. 안내판에 〈진교 남단 바다에 가까이 위치하며 노적(露積)가리처럼 우뚝 솟아있어 옛날에는 소오산이라 하였으나 벙목처럼 생겼다고 병요산(甁要山)이라 부르기도 하였다. 이명산 주맥(主脈) 따라 끊어질 듯 이어져 산을 오행설에 따르면 금상(金相)이고 바다를 건너다보는 자라(鰲) 형상과 같아 금오산(金鰲山)이라 부르고 있다. 높이는 849m이고 둘레는 34km이다. 정상에서 바라본 풍경은 지리산의 웅장함과 다도해의 아름다움과 광양 만에 현재의 발전상이 어우러져 천혜의 경관을 만들고 있다(2021.11)〉. 이름의 유래가 다양하다. 쌀이 주식이었던 시절에 논은 생존의 터전이었고 자기 논에서 농사를 지어 풍족한 쌀로 겨울을 나는 것이 절실한 바램이었다. 들에서 타작을 하여 나락을 가마니에 담고 논에 차곡차곡 쌓이는 것을 보는 마음은 얼마나 좋겠는가. 주인은 차츰차츰 마음이 풍요로워지고 일꾼들은 선망의 눈으로 보게 된다. 들판에 높게 쌓인 나락가마니를 볼 때마다 기분이 흐뭇해지는 것이다. 노적가리를 산으로 보게 되어 우뚝 솟은 산이라 소오산으로 불렸다. 또는 병의 목처럼 잘록하게 볼 수 있어 병요산, 자라가 바다를 건너다보는 산의 형상이 금상을 닮아 금오산으로 되었다.
-
편지소인이 찍힌 손편지를 받고 싶다. 내용이 무엇이든 크게 상관하고 싶지도 않다. 그 편지를 쓰는 동안 나를 생각하며 고민하고 있을 그 모습은 생각만 해도 행복하다. 내 글쓰기의 시작은 쪽지 쓰는 일로 시작했는지 모르겠다. 속마음을 입으로 하기가 민망하여 글로 전하던 시절이 있었다. 친구 간 편지가 그랬고, 가족 간의 편지도 있었고 조금 더 자라서는 연애편지도 있었다. 고등학교 시절 정성스레 편지를 써서 내 책상 위에 툭 떨어뜨리고 달아난 친구는 지금도 내 단짝이다. 어른이 되어서도 서로 편지를 주고받았었는데 휴대폰 이후로 우리의 편지 쓰기는 끝이 나버렸다. 그 즐거운 놀이가 끝난 줄도 모르고 살았다. 겨울비가 온다. 빗소리가 좋다. 쓸쓸하기도 하고 행복하기도 한 마음이 참 오랜만에 숨겨둔 나를 만나는 것 같아서 즐겁다. 이 비가 그치기 전에 생각나는 사람들에게 내가 먼저 손편지를 써볼까 생각하니 마음이 따뜻해진다. 끝난 줄도 모르고 있었던 그 즐거운 놀이를 다시 시작하고 싶다. 젊은 시절, 우체국에서 하는 ‘전국 편지쓰기 대회’가 있었다. 시골생활이 지루하던 내게 좋은 소식이었고 연락을 받았다. 우체국에서 상장과 매달을 받았다. 아이들이 겨우 걷기 시작할 무렵이었고 자랑할 게 생겨서 좋았던 기억이 난다. 그 이후 수상자들의 모임이 생겨 몇 번 만나기도 하고 서로 손편지를 주고받았다. 지금도 잊히지 않는 몇 분의 소식이 궁금하다. 장마철에 보내는 편지봉투에는 초를 칠했다. 혹시 물에 젖어 아저씨가 주소를 모르거나 편지가 젖을까 염려가 되어서였다. 그걸 알아봐준 어른이 계셨다. 전국 회장직을 맡고 계셨던 어른이었는데 그 시절 그 분의 편지가 내게 많은 위로와 지지가 되었다. 잊고 있었던 고마운 어른이다. 혼자 알아서 잘 자랐다고 생각했지만 결국 우리는 시절마다, 공간마다 나를 나답게 해 준 많은 친절한 이웃들이 있다는 사실을 또 한 번 깨닫는다. 좋은 사람은 긍정의 에너지를 주었지만, 그와 반대로 부정의 에너지를 주어 나를 자극했던 사람도 나에게 도움을 준 사람이었을 것 같다. 이 나이가 되어보니 알겠다. 모든 인연들이 얼마나 소중한 것인지. 가다가다 만나는 인연들이 예사롭지 않다. 다음 주에도 나는 상담교육을 받으면서 알게 된 좋은 인연들을 만나기로 했다. 젊은 친구들도 있고 비슷한 연배도 있다. 같은 길을 가는 사람끼리의 연대는 더 깊고 단단하다. 밤새워 나눌 이야기가 있고 서로를 위로하고 지지해줄 줄도 안다. 지치고 힘들 때 손 내밀 사람들이 있다는 건 축복이다. 겨울비 소리에 반해 마음이 한껏 넓어진 나는, 편지를 받고 싶어 하던 마음을 바꾸어 편지를 써보려고 한다. 우선, 반성문을 쓰는 손녀에게 ‘편지란 이런 것 이란다.’ 가르쳐주고 싶다. 답장을 받고 싶은 마음은 일단 감추어 둔 채로… 그리고 멀리 있는 내 단짝 친구와 잊고 있었던 놀이를 시작해보자고 장난을 걸어 볼 생각이다. 또 생각나는 얼굴들도 있다. 혼자 열심히 자신을 돌아보고 있는 그녀에게도, 끝나지 않은 일로 피곤해 있을 아들에게도, 새로운 일을 시도하고 있는 친구에게도, 결혼 전 선생님을 만나게 되어 정말 다행이라는 젊은 친구에게도… 내 편지를 받고 행복해 할 사람들의 얼굴이 벌써 나를 흥분시킨다. 나를 들뜨게 한다. 우푯값이 얼마였지? 궁금해지기도 한다. 워낙 이상한 우편물들이 많은 지금, 내편지가 그들의 손에 잘 전달될 수 있을까 하는 생뚱맞은 걱정마저 든다. 편지지와 편지봉투는 있을까? 몇 년 동안 간직해온 우편엽서는 어디에 있는지 알고 있다. 요즘 봉투의 용도로는 결혼식이나 장례식에 축의금이나 조의금으로 채워지는 것이 고작이다. 이제 봉투에게도 본연의 일을 할 수 있도록 기회를 주자. 내가 기억하는 사람들의 주소와 이름도 적어주고 우체국의 소인도 찍어서 멀리 날아갈 수 있도록 날개를 달아주자.
-
수학이 우리를 지혜롭게 한다수학은 국력이다. 수학을 포기하는 학생이 해를 거듭할수록 늘어 나고 있다. 초등6년생 중 36.5%, 중등 3학년생 중 46.2%, 고등 3년생 중 59.7%가 수학을 포기한 학생이라는 통계가 있다. 국력에는 하드 파워와 소프트 파워가 있다. 수학은 소프트 파워를 이루는 핵심 요소이다. 수학을 살려야 대한민국에 미래가 있다. 이공계 대학의 교수들은 신입 학생들의 수학 실력이 날로 떨어져 가고 있다고 말한다. 대학에 입학한 신입생들에게 과외 활동으로 수학을 가르친다. 수학은 다른 과목들과 다르다. 국영 과목은 열심히 하면 성적이 오른다. 수학은 그렇지 않다. 수학은 단계별 이해와 응용능력을 갖춰야 그 다음 높은 단계의 수학을 다룰 수 있다. 어느 단계에서 진도를 소화 못하고 놓치면 그 다음으로 이어지는 수학은 계속 겉돌게 된다. 수학의 특징은 부품들을 가지고 잘 결합시켜 다음 단계의 높은 능력을 발휘하게 한다. 부품들 중 어느 하나라도 완전하게 자신의 것이 아닌 상태이면 다음 단계로 진입할 수가 없다. 어느 단계에서 수학을 푸는데 막히는 경우, 필시 그 이전 단계의 수학이 잘못 이해된 결과이다. 발견해 바로 잡아야 한다. 기본소득은 수학을 안다면 내 뺏을 수 없는 말이다. 수학을 도외시하고 포퓰리즘으로 보면 기본소득을 논 할 수 있을 것이다. 기본소득의 가장 큰 문제는 기본소득을 보장받는 국민이 지속발전가능성을 가지지 못한다는 것이다. 기본소득이 보장되니까 보장되는 만큼 노동을 안 하려는 경향을 가지게 된다. 기본소득은 국민에게 근로 의욕을 떨어트리는 독약이 될 것이다. 기본소득 그림을 그린 그들의 계산은 수포자들이 수학을 제대로 이해하지 못한 사례로 길이 남게 될 것이다. 수학은 포퓰리즘의 어두운 그림자를 걷어낼 수 있는 지혜를 만들게 해 준다. 차세대들이 어떻게 수학을 접근하는지 유심히 볼 필요가 있다. 문제지와 학원이 그들을 더욱 깊은 수학으로 안내한다. 사고능력의 증대와 비례하여 수학 과정이 높아져야 한다. 그렇지 않은 경우 수학은 부담으로 다가온다, 학교는 수학 교육에 있어 주도권을 상실한 오래다. 생활 속에서 물리와 함께하는 수학을 차세대에게 안내하여야 한다. 생활 속에 수학이 숨어 있음을 발견하게 한다. 수학은 내 친구라는 구호를 가진 곳이 있다. 미국 뉴욕시 맨하탄 중심부에 수학 박물관이 있다. 수학의 어려운 수식과 기호는 하나도 보이지 않는다. 오로지 놀이 시설 같은 기구들이 즐비하다. 놀이 기구를 즐기면서 그 기구 속에 들어 있는 원리가 수학으로 표현된다는 것을 스스로 알게 한다. 모든 놀이 기구에 숨어 있는 수학을 한번에 다 알 필요는 없다. 성장해 나가면서 수학에 어려움의 정도가 점점 높아 질 때 수학 박물관의 놀이 기구는 즐거운 상상력으로 다가와 도움을 줄 것이다. 구슬을 위에서 아래로 떨어 지게 한다. 떨어 질 때 마다 두 곳 중 한 곳으로 떨어지게 한다. 위에서 아래로 10단계에 걸쳐 구슬이 떨어 진다. 떨어 질 때 왼쪽 오른쪽 둘 중 한곳으로 떨어진다. 100개의 구슬이 다 떨어 지고 난 모습은 어떻게 될까? 이것을 몇 차례 반복해 보면 어떻게 될까? 구슬들이 떨어진 현상을 관찰해 본 사람은 일생 동안 통계란 무엇인지를 제대로 이해하게 될 것이다. 기본소득은 받은 그 만큼 사람을 게으르게 만든다. ‘통계와 확률이 무엇이다’ 라고 듣는 것 보다는 한번 실증적 경험을 해보는 것이 더욱 도움이 될 것이다. 이러한 도움을 주자는 취지에서 수학 박물관은 존재하고 있다. 국민들의 사랑을 받고 있다. 기본소득은 발붙일 틈이 없어진다.
-
순영이의 크리스마스 선물12월이다. 빨강과 초록이 어울리는 달이기도 하다. 크리스마스 캐롤이 여기저기서 들리기 시작하는 달이다. 복잡한 생각들이 머리를 채우는 요즘, 굴러다니는 털실을 찾아 목도리를 뜨기 시작한다. 잡생각을 없애고 손을 움직이는 일로는 뜨개질만한 것이 없다. 올겨울 완성해서 사용할 수 있을까 생각하다 쿡 웃음이 난다. 겨울이면 생각나는 이야기 하나가 있다. 벌써 20년도 훨씬 지난 일이지만 어제처럼 생생하다. 그해 겨울, 내게 크리스마스 선물로 목도리를 만들어주겠다고 선언한 순영이는 붉은색 뜨개실과 대바늘을 가방에 넣고 다녔다. 초등학교 정문 앞에서 공부방을 하던 시절, 순영이는 6학년이었다. 웃음이 많고 엉뚱한 데가 있던 순영이는 지금 삼십대 중반이 되어 있겠다. 어디서 어떻게 살고 있을까 궁금해진다. 매일 공부방을 오는 순영이의 목도리는 어느 날은 조금 길어졌다가 또 어느 날은 다시 짧아지기도 해서 완성할 기미가 보이지 않았다. 위로 갈수록 좁아지다가 코가 하나 빠져서 또 풀기도 해서 진도가 못나간다며 깔깔거리며 웃었다. 결국은 미완성인 채로 바늘과 함께 내게 크리스마스 선물로 주었다. 겨울이면 생각나는 특별한 선물이다. 목도리를 사용하는 계절이 오면 어김없이 생각나는 사람이 순영이다. 눈이 크고 볼이 발그레하던 아이, 무엇이 그렇게 재미있었는지 항상 싱글거리던 아이였다. 뜨개실과 바늘로 내게 준 선물이었지만 그 마음만은 완성된 거여서 충분했다. 지금도 많은 초등학생들을 만나고 있지만 순영이 같은 아이는 어디에도 없다. 그 시절엔, 가을이면 빛깔 고운 단풍잎을 주워다 주던 아이도 있었고, 예쁜 돌멩이를 주워다 주던 아이들도 있었다. 사소한 것들에게 눈길을 주는 아이들은 어디에도 없다. 하나 같이 재미있는 일은 게임이고, 혼자 노는 일에 익숙하다보니 다른 사람에게 건넬 마음 따윈 아예 존재하지도 않은 듯하다. 건조하게 자라는 아이들 뒤에는 누가 있을까. 감정이 메마른 젊은 부모들이 있는 듯하다. 상담실을 찾는 젊은 부모들이 제일 어려운 일로 자녀 양육을 든다. 도대체 아이들을 어떻게 키워야 할지 모르겠다고 하소연하는 사람들이 많다. 몸집만 커진 아이가 몸집이 작은 아이들을 돌보고 있구나 하는 생각이 들 때가 많다. 힘들어서 함께 울고 싶을 때가 많다고 하니 답답하기도 하다. 내가 키운 아들과 아들이 키우는 손녀를 바라보면 많은 차이가 있다. 고분고분하고 순했던 내아들과 달리 뻣뻣하고 자기중심적이다. 한결같이 고집불통이고 마음대로 하려고 한다. 바탕 자체가 다른 것 같다. 무엇이 아이들을 저렇게 만들었을까 사뭇 궁금하다. 주말이나 방학동안 잠깐 다녀가는 손녀를 보면 하루의 많은 시간들을 동영상을 보는데 사용하고 있다. 아들 내외도 아이 옆에서 전화기만 손에 잡고 그렇게 각자 놀고 있다. 하도 답답해서 아이만 데리고 밖으로 나오거나 좋아하는 놀이터를 가기도 하지만 그것도 잠깐 동안이다. 그림책을 보거나 책을 읽어주거나 하던 일은 케케묵은 이야기가 되었다. 부모가 해주지도 않고 아이가 원하지도 않는다. 걷기 시작하면서 잡은 테블릿은 더 좋은 성능을 가진 것으로 변했을 뿐 다른 변화는 없다. 하고 싶은 말이 많지만 하지 않는다. 서로의 감정만 상하게 될 것 같아서 하고 싶지 않다. 내 아들이라고 다를 것도 없다. 여느 젊은 부모들처럼 잔소리로만 들을 테니까… 그래서 가끔 손편지를 써볼까 고민 중이다. 내 아이들이 썼던 반성문을 보관하듯 내 편지를 보관해주려나 기대하면서…
-
박정희가 연구개발 제도를 손 본다면5.16 정부의 기술 관련 1961년도에 입법 성과는 지금의 국회에 비할 바가 아니었다. 경제기획원 내에 기술관리국을 신설했다. 지금의 과학기술정보통신부의 원조였다. 특허법과 변리사법을 제정했다. 실용신안법 및 디자인보호법도 그때 제정되었다. 산업표준화법, 계량에관한법률, 전파관리법 등이 함께 제정되어 시행되었다. 60년대 초부터 정부는 외자 도입할 때 기자재·시설을 운영할 기술인력이 중요하다는 인식을 가졌다. 경제개발 5개년 계획의 핵심은 경제운영을 위한 모델링의 역할을 발견한 것이다. 경제의 순환을 통해 경제의 선순환이 가동된다. 선순환 결과 이익이 쌓인다. 쌓인 이익은 재투자로 이어진다. 회전되는 경제의 규모는 점점 더 커진다. 국제 신용도가 높아진다. 외채 도입 원가가 낮아진다. 수익률 높은 수출을 위한 국제규모의 투자가 가능해진다. 규모의 경제를 이루게 된다. 이 속에서 박대통령 정부는 기술 수급과 조달이라는 핵심 모델링을 발견하게 된다. 모델링은 제한된 자원의 최대 효율을 위한 적정 배분, 그리고 효과분석을 철저하게 하여 지속적인 조정을 집행해 나가는 것이다. 좋은 경제개발 모델을 누가 주역이 되어 시행 하느냐에 초점이 모아졌다. 기술인력을 체계적으로 양성 해야겠다는 결론에 도달하게 되었다. 월남 파병에 따른 대미 경제협력 내용과 규모를 협상하는 테이블에서 한국정부는 키스트(KIST) 설립에 필요한 자금과 경영노하우를 지원해 줄 것을 미 존슨 정부에 원했다. 키스트 설립 준비단은 세계 1류 기술개발 조직을 벤치마킹하였다. 기업의 연구개발 요구를 계약에 의거 연구개발 목표로 삼는다. 기술개발을 위한 융복합 아이디어를 쉽게 구할 수 있다. 키스트는 과학보다는 기술에 방점을 찍었다. 기업으로부터 위탁연구과제를 수주해 산업기술을 개발해 납품하는 체계였다. 기업이 연구결과물에 대해 평가를 하였다. 연구결과에 대해 연구원들이 평가를 받는 체계였다. 최고 결정권자의 집요한 관심이 과학기술자의 방만함을 미연에 방지할 수 있었다. 키스트의 성공사례는 키스트 경영자의 탁월한 조직관리 역량의 결과이기도 하다. 키스트는 공무원, 공조직을 어떻게 관리하느냐에 관해 최고결정권자의 능력이 조직의 성공 여부를 결정하는 중요한 변수임을 보여주는 사례이기도 하다. 조직이 가지는 폐단을 용납하지 않는 지도자의 혜안과 결단이 있었다. 일의 핵심을 놓치지 않는 지도자의 탁월함이 요구된다. 윤성렬 정부의 알엔디(R&D) 사업관리는 몇 점을 주어야 하는가? 성과평과 결과를 반영한 구조조정이 되어야 한다. 한번 만들어진 프로그램은 큰 변화 없이 차기 년도 예산이 확보된다. 현재 프로그램(알엔디 분야별로 사업들을 모은 집단)의 수가 너무 많다. 알엔디 평가를 위한 전문기관을 만들어 놓고는 진작 그 기관은 평가를 직접하지 않는다. 평가 기관은 단지 평가 과정에 대한 업무를 관리한다. 책임이 교묘하게 분산된다. 평가기관이 책임지지 않는다. 평가위원과 평가단이 책임진다. 이들의 명단과 평가 내용은 공개되지 않는다. 평가기관의 담당자는 상부의 의견을 음으로 또는 양으로 평가위원들에게 전하게 된다. 평가위원들은 상부의 의견을 참고하지 않을 수 없다. 이런 환경에서 내년도 알엔디 예산을 미세 조정한 것이다. 부분적으로 구조 조정한 결과이다. 알엔디 예산이 전년 대비 준 것은 본격적으로 예산이 증가하기 시작한 30년 이래 처음 있는 이벤트이다. 알엔디 예산의 반 이상은 연구인건비이다. 연구원 개인별로 연구에 실제 참여한 비율만큼 연구비가 지급되는지에 대한 세밀한 계획과 실적 정산이 필요하다. 연구 인건비 운영계획을 상세하게 작성하여야 한다. 연구업무상세구조(더불유비에스,WBS)가 익월 분 1달 단위로 필요하다. 연구원 개인별 1주일 단위까지 표기할 수 있도록 상세하게 작성되어야 한다. 그리고 계획된 내용과 실제 집행된 내용이 대비가 되면서 실적 평가가 되어야 한다. 한 연구원이 여러 연구 사업에 걸쳐 참여한 연 참여율이 100%를 넘어서는 안 된다. 현재 이를 거르는 검증과 처리 단계는 미비한 상태이다. 연구결과에 대한 성과평가가 철저하게 이루어져야 한다. 연구상태계가 건강해 진다.
-
이순신 백의종군로 니사재난중일기는 충무공 이순신이 진중에서 쓴 일기이다. 임진왜란이 발발하기 3개월 전 선조 25년(1592) 1월 1일부터 선조 31년(1598) 11월 17일까지를 기록한 것으로 국보이다. 난중일기란 제목은 이순신 사후 200년이 지나 정조 때 이충무공전서(李忠武公全書)를 편집할 때 붙여진 이름이다. 난중일기 백의종군편은 1597년 4월 1일부터 8월 2일까지이며 하동으로 들어오고 하동으로 나간다. 도원수 권율 진영으로 가는 길에 악양과 두치에서 각각 1박, 하동읍성에서 2박하고 청수역을 거쳐 북방으로 길을 잡아 덕천강변을 따라 이동한다. 정개산성 아래에서 나룻배로 원계에 내린다. 금만촌에 들어 감나무골을 지나 남사리에 도착하여 1박하고 삼가를 거쳐 합천 도원수 권율 휘하에 머문다. 칠천량 해전의 참패를 보고 받고 도원수와 전략을 논하다 해안지방을 직접 둘러보면서 옥종에서 5일을 머문다. 원계 손경례 집에서 삼도수군통제사 재임용교서를 받고 임지로 가는 한나절 하루 밤을 하동에서 보내는 일정이다. 이순신은 하동읍성에서 길을 나선다. 〈1597. 6. 1. 경신. 비가 계속 내렸다. 하동읍성에서 일찍 출발하여 청수역 시냇가 정자에 이르러 말을 쉬게 하였다. 저물어 단성 땅과 진주 땅의 경계에 있는 박호원의 농사짓는 종의 집에 투숙하려는데 주인이 반갑게 대하기는 하나 잠자는 방이 좋지 못하여 간신히 밤을 지냈다. 장지 두 권, 백미 한 섬, 소금 다섯 말 등을 하동 현감이 보냈다〉. 남사예담촌의 니사교(尼泗橋)를 건너자 이순신백의종군로 표지석을 볼 수 있다. 〈니사재(尼泗齊). 이곳은 이순신 장군이 권율 도원수부가 있는 합천(율곡)으로 가던 길에 하룻밤 유숙한 곳이다. 1597.6.1. 이순신 장군은 억수처럼 내리는 빗속에서 청수역을 떠나 단성에 이르러 박호원의 농사짓는 이곳의 노비집에 하루를 묵었다〉. 尼와 泗의 뜻은 ‘여승’ 그리고 ‘물 이름’이고 음은 ‘니’와 ‘사’이다. 이순신 장군은 이 지역의 유력한 집안인 박호원 내력을 알고 이곳에 유숙한 것이다. 그러나 밤새도록 내리는 비에 방마저 좋지 않아 선잠을 잘 수밖에 없었다. 다음날 장군은 아침 일찍 삼가현을 향하여 출발하였다. 박호원은 세종 때 황희 정승의 5대 손녀와 결혼한 박이의 아들로 본관은 밀양이며 호는 송월당이다. 명종 17년(1562) 임꺽정 도적을 진압하는 공을 세우기도 했고 호조판서・참판을 역임하기도 했다. 니사재는 박호원의 재실로 철종 8년(1857)에 건립하였다〉. 볏짚으로 지붕을 단장한 초가집으로 사랑채와 몸채이다. 이순신은 사랑채에 유숙했을까 아니면 주인이 안채를 내어 주었을까! 집 옆으로 축대를 쌓고 아슬아슬 돌계단을 오르자 거유문(居由門)이다. 고개를 숙이고 출입하라고 낮고도 좁다. 고개를 들자 처마 밑에 니사재(尼泗齊) 현판이 고개를 거듭 숨이게 한다. 좌측으로 울창한 매화나무 앞에 안내판이 있다. 〈나사재 매화나무(박씨매). 이순신 장군이 백의종군시 박호원 농노집에 유숙할 때 매화나무를 보고 위안을 삼았다는 유래에서 후계목으로 가꾸어 오고 있다〉. 이순신 유숙한 260년 지나 니사재가 건립되었고 매화를 심어 귀인을 챙기는 후손의 마음을 읽을 수 있겠다. 본채 옆에 오래된 배롱나무가 꽃을 피운다. 가지 아래 사각형 연못과 가운데 둥근 돌을 심었다. 물풀이 수면을 덮고 노란 꽃이 피었다. 방지(方志)는 품위를 높이고 집안의 기운이 빠져나가지 않도록 하는 장치이다. 하늘은 둥글고 땅은 네모지다(天圓地方)는 우주관을 보여 주는 것으로 육안으로 파악할 수 있는 우주의 형체를 설득력 있게 묘사했다는 장점 때문에 서양천문학이 도입되기 이전까지 고대 우주관의 주류로 자리매김해왔다. 가운데 기둥 사이에 마루 보다 한 뼘 낮춰 가로 판자를 붙여 오르기 쉽고 걸터앉아 주변을 살피게 장치하였다. 우측으로 고개를 돌리니 담장과 처마 사이로 우뚝 솟은 봉우리는 니구산(尼丘山)이라 불린다. 공자가 태어난 추읍(지금의 산동성 곡부시 동남쪽)의 니구산, 남사예담촌을 돌아 흐르는 泗水川도 추읍을 흐르는 泗水에서 빌려온 이름으로 볼 수 있겠다. 공자(BC 551~479)는 尼丘山에서 아버지 숙량흘과 어머니 안징재가 기도를 드려 태어났다. 그의 머리 중앙이 들어간 반면 주위가 불쑥 돋아 있어 이름을 구(丘:언덕)라하고 자를 중니(仲尼)라 하였다. 경북 대구의 ‘구’를 丘로 하려다 공자 이름을 피하려 邱로 했다는 설이 전하고 있다. 이곳의 산 이름을 바다 건너 머나먼 중국의 니구산을 빌려온 것은 얼마나 공자를 흠모하는지를 알게 한다.
-
의대 증원 소탐대실하지 말아야하바드대 한 노 교수가 학생들 앞에서 실험을 하였다. 투명 용기 속에 굴기가 각기 다른 골재를 아무 생각 없이 넣었을 때와 큰 것부터 차근차근 넣었을 대 어느 쪽이 많은 양의 골재가 들어가는지를 실험으로 보여 주었다. 큰 것부터 다음 크기의 것으로 순차적으로 넣었을 때 최대의 양이 들어가는 과정을 보여 주었다. 교수는 ‘중요한 것’부터 먼저 해야 한다는 것을 보여주고 있다. “내가 여러분에게 보여주고 싶었던 것은 큰 돌을 가장 먼저 넣지 않았다면 나머지 자갈과 모래는 영원히 집어 넣지 못했을 것이라는 점입니다. 여기서 말하는 ‘큰 돌’은 국가경영에 있어 ‘가장 중요한 일’들을 말하는 것입니다.” 국가경영의 유리병 안에 모래를 먼저 넣는다면, 큰 돌이 들어갈 자리는 없게 된다. “큰 돌”은 ‘안보’ ‘지속발전 가능성’ ‘신뢰와 국민통합’ ‘건강과 국민행복’ ‘저출산 대책’ ‘균형발전’ ‘ 균형의료’ ‘연기금 개혁’ ‘경쟁력 확보’ ‘교육개혁’ 등 국가경영에서 가장 우선해야 하는 것 열가지들이다. 병 안에 먼저 사소하고 작은 것을 채우는데 시간과 힘을 써버린다면, 정작 국가경영에서 가장 중요한 것들에 손댈 시간이 없어짐으로써 대통령 임기 내내 시시콜콜한 일이나 처리하며 살아야 한다. 가장 중요한 ‘큰 돌’을 먼저 생각하면서 국정의 우선순위를 정해야 한다. 나머지는 모두 모래일 뿐이다. 국가경영에서는 ‘급한 일’보다 ‘중요한 일’을 먼저 해야 한다. 우선순위를 정하여 ‘가장 중요한 일’부터 시간과 노력을 쏟아 넣는 것이 필요하다. 표 받으려 해서는 안 된다. 현재 대한민국은 의료 부분에 있어 골머리를 앓고 있다. 지난 주말 정부는 대학 총장들에게 물어 봤다. 의대 정원을 얼마나 증원해야 현금의 문제를 해결할 수 있냐고? 2-3천명 증원해야 한다는 조사결과를 발표했다. 의협은 과학적 근거가 부족한 조사였다면서 강력 반발하고 나서고 있다. 문제의 발단은 필수 의료 분야(소아과 등)에 의사가 말랐다는 점, 지역 의료가 고사 위기에 몰렸다는 점 등이다. 대한민국에서 의료 불균형 문제는 기울어진 운동장과 같다. 의대 중원은 기울어진 운동장을 바로 잡겠다고 기울어 진 곳에 부삽으로 흙을 퍼 붇는 것과 같다. 우매해 보인다, 중요한 일은 기울어진 운동장이 왜 발생하게 되었는지 그 원인을 찾아 수술을 해야 한다. 의사가 없는 빈 곳에 의사를 충원하려고 의대 정원을 늘린다는 것은 너무나 순진한 생각이다. 의사가 늘어나면 우선 국민 부담이 더 커진다. 의사 수를 늘리는 것보다 먼저 해야 할 ‘중요한 일’이 있다. 의료인에 대한 존경과 사회적 보호를 강화해야 한다. 진상 고객으로부터의 공격에 사회적 방패막이 구비되어야 한다. 의료사고 분쟁에 있어 의사의 미필적고의가 아닌 한 의료사고에 의사를 보호하려는 사회적 인프라 구성이 필요하다. 의료인들의 윤리 의식도 함께 상승하여야 한다. 동네 의원 중심으로 1차 진료 기관이 활성화 되어야 한다. 동네 의원은 원격진료의 센터가 된다. 동네에 사는 의료 소비자들의 주치의가 된다. 상급 의료 서비스 요구에 대해 부담이 경감 되어야 한다. 문재인 케어를 되돌려 놔야 한다. 국민의 건강보험료 부담 증가를 막아야 한다. 국민 부담을 덜어준다고 급여화를 넓히는 과정에서 대형병원 환자 쏠림 현상과 일차 의료 체계의 붕괴가 현실화 되어 가고 있다. 의공학과 신설이 필요하다. 의학과 공학이 한곳에서 만나야 한다. 의료서비스의 접근성을 위해서 가성비 높은 의료 기구와 기기들이 필요하다. 젊은이들의 창업에 도움이 된다. 해외 수출에도 기여하게 된다. 이러한 해결안을 모두 이행한 후 의대 중원을 통해 해외 진출을 위한 의료인을 기를 필요는 있다.
-
마음먹기주말엔 막내 여동생을 만나 파크골프를 한다. 횡천골프장이 많이 밀리지 않아서 좋다. 강변에 위치한 횡천골프장은 규모는 작지만 그냥 운동 삼아 걷기가 좋은 곳이다. 주변 산과도 잘 어우러져 있어 바라보는 일만으로도 기분이 좋아진다. 지난 주 처음 방문하고 매주 가보자고 약속을 했다. 사람들이 많은 곳은 기다리느라고 먼저 지쳐버리는 경우가 많아 적당하게 한적한 횡천골프장이 마음에 들었다. 처음엔 그냥저냥 이런저런 이야기를 나누며 시작했다. 스피커에서 흘러나오는 귀에 익은 올드 팝송이 마음을 편하게 하고 운동을 나온 사실만으로 위로가 된다. 그러나 적극적이지 않고 진지하지도 않다. OB(골프공이 선을 넘어 구장 밖으로 나가는 일)를 내는 일이 다반사다. 그렇다고 크게 자책하거나 조심하지도 않는다. 그런 우리를 나무라기라도 하듯 점심내기를 하기로 한다. 조심스럽게 경기에 임한다. OB를 내는 횟수도 줄었다. 긴장감으로 경기에 임한다. 잘하려고 노력을 시작한다. 시시하던 경기에 탄력이 붙는다. 타 수를 세며 차례를 기다리고 공을 어디로 보낼지 한 번 더 생각한다. 마음을 어떻게 가지느냐에 따라 사소한 것들이 달라진다. 게임에 진 동생이 점심값을 지불하고 웃으며 이야기 한다. ‘다음 주에는 내가 이길 것이니 잘 준비하셔.’ ‘그래, 그래라.’ 즐거운 맘으로 다음 주를 기약하고 헤어진다. 공부를 시작하기 전이다. 내가 하고 있는 상담사 일에 도움이 될까 하여 시작해보고 싶은데, 자신이 없어 미뤄두었던 일이기도 하다. 자격을 취득하든 못하든 시작하는 일이 우선이라는 생각을 해보는 날이다. 망설이는 시간을 줄이는 일로 ‘시도’만큼 좋은 일은 없다. 그 시도에 오류가 있거나 혹은 실패하더라도 시도한 만큼의 과정은 남아 새로운 시도의 밑거름이 되어 줄 테니까. 올해는 작은 아이가 하던 일을 그만두고 새로운 시도를 한 해이다. 나름대로 새로 시작한 일에 마음을 다하는 모습을 보았다. 자격증을 따고 새로운 일을 시작하기 위해 준비를 하고 있다. 올해가 가기 전에 결실을 얻을 수 있다면 얼마나 다행스러울까. 그러나 결과가 그렇지 못하더라도 작은 아이에게 올 한 해는 중요한 시도를 한 해로 평생 남을 것이다. 새로운 시도를 했고, 그 시도에 마음을 다했고, 그 결과를 기다리고 있는 아이의 초조함이 느껴져 마음이 시리다. 그러나 나는 믿는다. 아이의 노력으로 얻은 새로운 시도와 결과가 인생의 터닝 포인트가 되어 줄 것이라는 것을. 망설이다가 기회를 놓쳐버린 많은 사람들을 본다. 처음 시작한 직장을 평생직장이라 여기던 시대는 지났다. 여러 가지 경우를 수를 두고 한 번쯤 자신의 능력을 시험에 들게 해보는 것이 먼 미래를 위한 시도일 수도 있다는 생각을 해본다. 인생이 길다. 일을 하지 않고 보내는 노년은 지루하다. 퇴직 후에도 또는 노년에도 나만이 할 수 있는 일을 장만해두는 일은 요즘 젊은 친구들에게 꼭 필요한 항목인 것 같다. 젊은 내담자들을 만나면 노년에 할 수 있는 일로 무엇을 준비하고 있는지 물어본다. ‘선생님이 취미로 하고 있는 악기를 계속 열심히 하여 다른 사람을 가르칠 수 있도록 하시면 좋겠네요.’ ‘지금 새로 시작해도 가능해요. 퇴직 후 전문가가 되도록 마음을 내어 보는 건 어때요.’ 자신이 행복한 일을 찾아내는 것, 나만의 기능으로 키워나가는 일, 현재 힘든 상황들을 견뎌내고 위로가 되는 일을 찾아보자, 더 늦어지기 전에. 마음을 내는 일로 이미 시작한 것이 될 테니까.
-
남명 그리고 이순신과 칠송정남명 조식은 1558년 4월 11일부터 25일까지 삼가 계부당 출발-진주 마현-사천-곤양 앞바다-하동포구-쌍계사–신응사-악양-청수역-뇌룡사를 유람하고 《유두류록》을 남긴다. 〈4월 23일. 저녁에 옥종 삼장골에 있는 청수역에 이르렀다. 역관 앞에는 정씨의 정려문이 있다. 정씨는 승지 조지서의 아내이며 문충공 정몽주 현손녀이다. 정려문 건너편에 지족당 조지서 무덤도 있다. 4월 25일. 10여일 동안 동고동락했던 벗들이라 헤어지기가 쉽지 않았다. 남명은 칠송정에 이르러 높은 누각에 오른 뒤에 배를 타고 다회탄을 건넜다. 남명은 한유한 정여창 조지서의 유적지를 둘러본 것을 가슴 뿌듯하게 생각했다. 이 세 사람을 높은 산과 큰 내에 비교하여 “십층이나 되는 높은 봉우리 끝에 옥을 하나 더 올려놓고 천 이랑이나 되는 넓은 수면에 달이 비치는 격이다. 산속에는 바위에다 이름을 새겨둔 것이 많으나 세 군자의 이름은 결코 바위에 새겨져 있지 않았다. 그렇지만 앞으로 그들의 이름은 반드시 길이 세상에 퍼져 전해질 것이니, 만고의 역사를 바위로 여기는 것보다 나은 것이 어디에 있겠는가?”〉. 연산군이 세자시절 시강원을 두어 교육시켰다. 스승을 사부(師傅)라 하여 영의정은 師가 되고 좌・우의정 중 한 명이 傅가 되었다. 아래에 이사로 종1품 찬성, 종3품 보덕, 정4품 필선, 정7품 설서까지 5명은 전임이다. 조지서는 보덕이고 허침은 필선이었다. 세자는 공부에 관심이 없어 강의를 해도 모두 귀 밖으로 듣자 조지서는 책을 던지며 “임금(성종)께 아뢰겠다!”고 꾸짖었고 반면에 허침은 부드러운 말로 타일렀다고 한다. 조지서는 연산군이 왕위에 오르자 창원부사를 자청하여 내려왔다. 인근 덕천강변 경치 좋은 장소에서 낚시를 하며 시름을 달랬는데, 그곳에 아들 조정이 정자를 지어 칠송정(七松亭)이라 했다. 갑자사화가 일어나 말이나 행동이 도리에 어긋나고 오만하다는 죄목으로 조지서는 죽임을 당한다. 이순신은 선조 25년(1592) 1월 1일부터 선조 31년 노량해전에서 전사 2일전 11월 17일까지 출전한 날을 제외하고 매일 기록하여 국보 76호 《난중일기》가 되었다. 〈1597년 7월 20일, 종일 비가 계속 내렸다. 낮에 진주 정개산성 아래에 있는 강가 정자에 이르렀다. 진주목사가 와서 만났다. 굴동 이희만의 집에서 잤다. 1597년 7월 21일, 맑음. 일찍 떠나 노량에 이르니 사람들이 울면서 말하되, “대장 원균이 적을 보고 먼저 뭍으로 달아나 이 지경에 이르렀다”는 것이었다. 거제의 배위에서 자면서 거제현령 안위와 4경까지 이야기를 나누었다〉. 덕천강의 북방과 창촌을 잇는 창촌교를 건너자 진주농민항쟁 기념탑이 있다. 이 탑이 세워진 무실(수곡) 장터는 항쟁을 철시와 시위로 결정하고 이 여론을 주위로 확산시켜 나간 중요한 곳이다. 그 옆에 이순신백의종군로 표지석이 있다. 이게 왜 여기에 있을까! 고개를 갸웃거리며 창촌교 건너 북방 둑길을 걷는다. 강폭은 넓고 햇살은 눈부시다. 둑 아래 소방헬기를 보고 힘을 내어 걷는다. 칠송보준공기념표석(七松洑竣工紀念表石)이다. 1972년에 시작하여 3년 공사로 설치했다. 표석 앞에는 주인 없는 집을 고양이가 지키고 마당을 가로 질러 ‘칠성길’이다. 남명은 칠송정에 이르러 배를 타고 다회탄을 건넜건만 이제는 시멘트로 보를 쌓아 물을 담아 두게 되었다. 태양광 전지판 밑을 지나는데 여자 목소리로 ‘수영금지지역!’ 몇 걸음 걷자 ‘수영을 금한다!’는 경고음이다. 으슥한 곳에서 또렷한 목소리는 반갑고 섬뜩하기도 하다. 걸음이 멈춰지고 감시카메라 앞에 나무 기둥을 세우고 상하 안내판이 달렸다. 하나는 ←이순신백의종군로→, 하나는 칠성길↑을 안내하고 있다. 이순신은 합천 도원수 권율 휘하에서 백의종군을 하던 중에 칠천량 참패를 보고받는다. 도원수와 늦도록 작전을 논하다가 현장을 직접 둘러보고 작전을 세우겠다고 한다. 이순신은 남해안과 덕천강 따라 정개산성 아래 숙소 사이를 오가며 방책에 고심한다. 장군은 복직 43일 만에 선봉대장 거제현령 안위 활약으로 명량대첩을 거둬 왜적의 호남 진출을 차단시켰다. 장군은 거제의 배위에서 안위와 왜적의 서해안으로 진출에 대한 대비책을 논한 것이다. 칠성길은 조지서가 정치적 광풍을 예견하며 시간을 낚는 고뇌의 길이다. 칠성보를 내려다보며 남명과 이순신의 행적을 어제의 눈으로 보고 오늘의 지혜를 찾는 사색의 정소로서 소나무 우거진 전망 좋은 곳에 칠송정(七松亭)을 복원하자! 북방 창촌교 옆에 이순신백의종군로 표지석을 새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