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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래도,‘미역줄기를 잘 먹더라. 장날에 나갔다가 몇 가지 준비를 했거든. 애들에게 반찬을 보내주고 싶은데…’ 방학이라 다녀간 큰아이에게 반찬을 보내주고 싶다고 어머니가 전화를 하셨다. 며느리는 외할머니가 해주시는 나물 반찬을 좋아한다. 무심한 듯한 큰아이가 할머니 보고 ‘할머니, 이거 우리가 가져가도 돼요?’ 하고 물어보더란다. 어머니의 말씀을 듣고 우리는 ‘아무것도 할 줄 모르는 아이들이 그래도 맛은 아는 모양이다야.’ 손주며느리가 당신이 하신 나물 반찬을 좋아한다는 걸 알고 아이들이 올 때마다 손수 반찬을 만들어 놓고 기다리신다. 큰아이는 특히 어머니에게 첫손자인데다 고등학교 시절을 아들 둘은 진주의 외할머니댁에서 보냈다. 그래서인지 외할머니와의 관계가 더 돈독하다. 또 첫 번째 증손녀도 어머니에게는 각별하다. 증조할머니와 놀이터에서 그네를 타기도 하는 사이이다. 그 아이가 벌써 초등학교 2학년이 되었으니 방학이면 아이들을 기다리고, 아이들이 먹을 음식을 준비하신다. 지금은 연세도 구순을 넘기시고 작은 일들도 힘들어 하시면서… 언제부터인가 아이들도 손님 같아졌다. 여름방학과 겨울방학에 잠깐 다녀가지만 손님을 맞이해야 하는 부담감은 자녀에게도 마찬가지다. 멀리 있어도 언제나 함께 있는 것처럼 매순간 톡으로 소식을 전하며 살고 있지만, 문화가 다른 세대들이 같은 공간에서 지내는 일이 편하지만은 않다. 처음 만났을 때 반가움은 있다. 보고 싶었던 마음으로 서로 얼싸안고 볼을 부비기도 하지만 그것도 잠시, 각자 전화기를 들여다보거나 TV를 시청하거나 한다. 반갑고 즐거운 몇 시간만 지나면 각자 집에서 지내는 방식으로 지낸다. 늦잠을 자는 사람은 늦잠을 늘어지게 자고, 일찍 일어나는 아이는 일찍 일어나 아침부터 유튜브를 보고 있다. 내가 느끼고 있었던 대로다. 아침잠이 적은 손녀는 일찍 일어나 할 일을 찾아다니고, 아들과 며느리는 눈치 같은 건 볼 필요도 없이 늦잠을 잔다. 그런 아이들이 못마땅하기도 하지만 그런 아이들의 생활 방식이 약간은 부럽기도 하다. 그래도 우리는 아이들을 기다리며 계절을 보낸다. 어린 시절 가까이 지냈던 외할머니와 우리 아이들의 좋은 관계는 다행스럽게 여기면서 외할머니가 더 좋다는 서너 살 시절의 손녀에게 야릇한 질투심을 가지는 건 또 무엇일까. 지금은 제법 자랐다고 곤란한 질문엔 즉답을 피하거나 나름대로 대처를 해서 우습기도 하지만… 자주 만나지 못하는 손녀의 말이나 행동이 가끔은 서운하기도 하고 대견스럽기도 하다. 조금 더 자라면 우리들의 관계는 어떻게 변해있을까. 며느리가 ‘할머니 나물반찬이 정말 맛있어요.’ 라며 상냥하게 이야기하면 어머니는 행복해 하신다. 요리에 관심이 많고 음식 솜씨가 좋으신 어머니는 당신이 하신 음식을 맛있게 먹어 주는 걸 좋아하신다. 더구나 첫 손자와 첫 손주며느리 그리고 첫 증손녀 타이틀을 가진 아이들이니 고단함도 연세도 잠시 밀어놓으신 채로 음식을 장만하신다. 이번엔 아이들을 보내고 다시 반찬을 준비하시고 택배로 보낼 수 있다는 새로운 사실을 접하고 즐거워하신다. 택배 물량이 많아진 지금, 빨리 도착해서 맛있게 먹어야 할 음식이라 걱정스럽기도 하다. 우리에게 쏟은 정성도 모자라 다음 세대까지 챙기고 계시는 어머니를 보면서 생각이 많다. 아이들과 적당한 거리를 두는 것이 서로를 위하는 일이라 여기며 살고 있는 우리 세대의 자녀 사랑과 다르다. 배운 적 없어도 무한하기만 한 그 사랑 앞에 오늘은 그냥 아무런 이론도 별 영향력을 미칠 것 같지가 않다. ‘우체국 가서 보내면 된다면서?’ 묻는 어머니는 신기한 방법을 찾은 것이 기쁘신지 목소리의 톤이 높다. 밤새 봄을 부르는 비가 내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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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평교 그리고 성평마을성평리 앞을 흐르는 주교천 둑길에 ‘전통과 문화가 살아 숨 쉬는 성평권역 배드리길 星坪里’ 안내판이 있다. 오리가 몸통을 기둥에 붙이고 하늘을 쳐다보고 있다. 나무로 머리와 목을 다듬어 몸통에 끼우고 다리 겸 막대를 안내판 상단에 고정하였던 것이다. 막대가 떨어져 나간 오리 몸통을 기둥에 걸쳤는데 부리는 먹이를 목으로 넘기는 모양새가 되었다. 아아, 솟대는 사라지니 오리는 앉을 곳을 잃었구나! 솟대는 새해 풍년을 기원하며 마을 입구에 수호신의 상징으로 세운 긴 나무 장대이다. 삼한 시대 소도에서 유래한 것으로 장대 끝에 나무로 만든 새 조각이 있는 모습이다. 지방에 따라 소줏대, 솔대, 별신대 등으로 불리며 진또베기는 강원도 지방에서 솟대를 일컫는 방언이다. 솟대의 새는 주로 오리로 만들었다. 오리는 물위를 떠다니기 때문에 홍수가 나도 마을이 안전하다. 옛 마을은 초가집으로 밀집되어 불이나면 온통 불바다가 되었다. 불을 지르는 귀신이라도 마을 입구에 있는 오리를 보고는 마을로 들어오지 못한다는 바램이다. 오리는 짝짓기를 하면 어느 한쪽이 먼저 죽어도 다른 짝을 만들지 않는다 해서 영원한 인연을 뜻하고, 새끼를 잘 돌봐서 가정의 평화와 부부 사이의 사랑을 상징한다. 성평리 안내판 상단에 솟대를 세우고 오리를 앉혔는데 바람을 받은 오리가 솟대에 비틀림을 주어 솟대와 분리된 것이다. 고하마을 안내판의 상단에 솟대는 떨어져 나갔고 오리는 날아가 버렸지만 솟대를 지지하였던 손가락 길이의 두 개의 금속지지대는 남아 있다. 안내판 좌측 하단에 배드리왕비길, 배드리수변길, 배드리읍성길, 배드리숲길 등에 색깔을 달리하여 친절하게 안내하고 있다. 〈성평리는 금오산을 등지고 고전면의 동쪽에 그 동쪽으로는 진교면과 남쪽으로는 금남면과 경계를 이루며 서쪽으로는 고하리 죽전과 주성・흥평(興坪)과 이웃하는 행정리이다. 성평리는 신석기 시대 또는 그 이전부터 사람이 살았을 것으로 여겨지며 대기야(250년) 때 고하리에 하동군의 읍기가 옮겨지면서 고하리와 하동군읍기 일원으로서 역사가 같이 시작되었다고 볼 수 있다〉. 우측 상단에 방위표가 있다. 시계의 1시와 7시를 세로축으로 4시와 10시를 가로축으로 하고 1시는 南이고 7시는 北 그리고 4시를 西이고 10시를 東쪽으로 보여주고 있다. 방위표대로 읽으면 주교천은 성평교 밑에서 北西로 배드리공원 앞에서 방향을 西로 급격히 돌아 南西로 흐른다. 왕비샘은 서쪽에 있고 성평샘은 동쪽이다? 안내도와 나침반을 정치하면 위는 北이고 아래는 南으로 우를 東으로 좌를 西로 된다. 왕은 남향하니 왕의 좌는 東이요 우는 西이며 아래는 南이고 뒤로는 北이다. 명당을 고를 때 좌청룡우백호남주작북현무를 살피고, 색으로 구분하면 東은 푸른색 西는 흰색, 南은 적이고 北은 검은 색이다. 성평교 건너 안내판에 〈마을안길 이야기. 성평마을은 예부터 많은 돌로 담을 쌓고 살았으며 복잡하고 긴 마을 안길도 돌담으로 되었다. 그래서 골목길이 협소하고 노면도 돌과 자갈이 많고 불편하던 길을 1960년 새마을 사업으로 1차 정비를 하였고, 1990년대 후반에 폭 4m로 웃물샘까지 자동차가 운행할 수 있도록 시멘트 길로 확장 포장되었다. 마을 돌담길과 징검다리, 물레방아는 이 마을 작사가 정두수의 노랫말에도 나오는 것으로 마을의 옛 모습을 말해주는 대목인데 이후로는 역사의 기록으로만 남게 되었다〉. 건너편 금오산 케이블카를 타면 너더랑에 닿을 듯하다. 성평리는 금오산을 등지고 터를 잡아 돌이 많아 돌담이 되고 열을 받은 돌이 밤에 토해 내면서 결빙 되어 물이 풍부하여 옥토로 되고 물레방아를 돌리게 된 것이다. 이름마저 성평(星坪)이라 별을 가까이 하고 넓은 들이 있는 것이다. 마을 젊은이들은 꿈을 갖고 이루려 한다. 예전에는 골목마다 돌담길이며 징검다리를 건너고 물레방아는 추억을 돌렸다. 이제는 사진으로 그 모습을 보여주자! 안내도에 웃물샘 표시가 없지만 왕비샘과 가로로 연결되는 성평샘은 지붕으로 보호를 받고 있지만 뚜껑으로 덮어 맑은 샘물 맛을 볼 수 없다. 그 옆에 연자방아 받침돌 가운데에 사각 홈이 있다. 담으로 둘러싼 비석의 비두는 원형 기둥으로 받치고 앞면에 하동정씨사열부기적비(河東鄭氏四烈婦紀積婢)이다. 烈婦란 절개가 굳은 여자를 말하는데 4명의 열부에 대한 공덕을 기록하였다. 옆면과 뒷면은 접근할 수 없다. 안내판에 공덕을 한글로 옮겨 오가는 사람 느낌을 갖도록 하자! 성평교를 건너는데 나훈아 특유의 꺾기로 ‘돌담길 돌아서며 또 한 번 보고 징검다리 건너갈 때 되돌아보며…’라는 가락이 주교천 위로 번지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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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느 것에 미쳐 결국 한곳에 미친 사람설날에 들려주고 싶은 이야기이다. 전남 장성군에 축령산(높이 621미터)이 있다. 그곳에 미친 사람 한 사람이 살았다. 독림가(숲을 조성하는 사업가) 임종국씨 덕분에 전국적 명소가 되었다. 젊을 때 군산에서 원산으로 출장 가면서 헐벗은 강토를 직접 목격했다. 가슴이 쓰렸다. 60년대에는 미국 정부가 파견한 공무원으로부터 산림 황폐화의 심각한 후유증에 대해 듣게 되었다. 나무가 없으면 산에서 토석이 흘러 내려와 농토를 덮쳐 결국 국토가 황폐화 된다는 경고였다. 살고 있던 동네 근처에는 편백을 잘 가꾸어 놓은 곳이 있었다. 그것을 보고는 편백을 심기로 결심하게 된다. 편백을 40대 중반부터 20년간 꾸준히 심었다. 편백 씨앗을 채취했다. 자가 묘목장에서 이 씨앗을 발아시켰다. 여의도 2배 정도의 넓이에 편백 약50%, 삼나무 약30%를 심었다. 심은 묘목의 수가 280만 주가 넘는다. 어린 나무 주위로 배수가 잘되게 고랑을 파 준다. 68년은 지독한 가뭄이 왔다. 어린 나무들이 시들시들 죽어 간다. 물지게를 지고 깊은 산속까지 물을 져다 날랐다. 목마른 어린 나무들에게 물을 줬다. 물 한 짐을 지고 한 시간 여 동안 산 위로 걸어 간다. 그 물로는 50그루도 채 못 준다. 식구들 마다 어깨에는 피가 난다. 동네 사람들은 처음에는 미친 짓이라고 비아냥거렸다. 묵묵히 한 방향으로 만 가는 임씨를 보고는 동네 사람들도 서서히 공감하기 시작한다. 밤늦게까지 산에 물을 져다 나를 때 횃불을 밝혀 주기도 한다. 멧돼지 들이 다가오지 못하게 징을 쳐 주기도 한다. 묘목을 팔아 자금을 마련했다. 조림 과정에서 인건비 등 운영자금이 모자랐다. 나무를 잘라 팔지는 않았다. 자금난을 견디지 못해 살점 같은 산을 남의 손에 넘겼다. 임 선생은 죽으면서도 산에 나무를 심으라는 유언을 남겼다. 73세의 일기로 타계했다. 당대에 덕을 보지 못해도 후회하지 않았다. 정부는 민간인들 소유로 되어 있던 편백숲을 사 들였다. 산림청은 이곳을 전국최고의 임업 경영 성공사례로 개발시켰다. 편백은 키가 높게 자란다. 임목축적(단위 면적당 나무들의 모든 체적)치가 다른 수종에 비해 크다. 단위는 사방 100미터(헥드알) 당 몇 입방 미터(m3)냐로 따진다. 일본이 145, 독일이 268 이다. 축령산 천연림이 101, 인공림이 250이다. 세월이 가면서 점점 더 커지고 있다. 편백나무는 피톤치드로 유명하다. 편백은 향기로운 냄새를 낸다. 꽃꽂이 할 때에도 향기가 좋아 편백잎을 사용한다. 피톤치드는 역겨운 냄새를 잡아 준다. 피톤치드를 몸에 많이 쪼이면 면역력 증진, 불면증 치유, 스트레스 완화 등에 효과가 있다. 결국 한 곳에 미쳤다. 한국인으로 최고 독림가 반열에 올랐다. 72년도에는 5.16 민족상을 수상했다. 산림청은 춘원 임성국 선생을 기리는 기념비를 세웠다. 선영에 묻힌 임 선생의 유해도 부인과 함께 축령산 수목장에 안치했다. 죽은 후에도 가르침은 후세에 전해진다. 축령산 편백 힐링 숲을 방문하는 사람들은 독림가의 염원을 느끼곤 한다. 편백 숲을 걸을 때, 이 숲을 가꾼 이를 생각하라. 묘목을 심을 때 마음을 아로새겨 봐라. 이 나무를 보는 이에게도 기쁨과 유용함 그리고 교훈을 주고자 하였다. 조림이 잘된 이곳을 보고 돌아가서는 각자의 거주지 주변 임야도 조림을 잘하였으면 좋겠다라는 선각자의 염원을 느낄 수 있다. 산림에서 힐링을 즐기는 애용자들은 고마움을 느낀다. 나무와 대화를 할 수 있다. 나무를 어루만져 준다. 나무와 교감한다. 사랑하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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투어리즘 변화에 대처하는 익산시는익산으로 관광상품 서비스를 모니터링하려 간다는 이야기를 들었다. 제일 먼저 생각나는 것은 보리밭 한가운데 반 정도가 무너져 시멘트 몰탈로 덧대 놓은 부분이 시커먼 색,미륵사지석탑이 떠올랐다. 50여 년 전 이였다. 당시 국민소득 310불이었다. 15년 전쯤 그곳에 가보았다. 석탑을 해체 복원을 위한 가설 건물을 설치하고 가림막 커텐으로 가려 놓았다. 석재 한 덩어리 마다 고유 번호를 매기고 보존실로 가져가 보존처리를 하고 있었다. 발굴 팀원은 열심히 측정하고 도상을 그리고 있다. 우주선 발사기지 같은 분위기다. 석탑은 7세기 축조되었다. 그동안 여러 차례 수리 복원하였다. 동북쪽은 6층까지 그대로 남아 있는 것이 기이하다. 1915년에는 일제가 반파된 부분을 시멘트로 보강했다. 2001년부터 2009년까지 해체·수리 중 완전한 형태의 사리장엄구가 발견되었다. 같이 발견된 탑지에는 왕비가 무왕 40년(639년,) 탑을 건립했다고 적혀 있다. 사리를 봉안하고 있다. 사리를 넣는 집게도 옆에 있다. 석탑은 목탑을 짓듯이 석재를 조립했다. 조립하기 전 면밀한 설계를 했다. 6층 일부가 높은 곳임에도 불구하고 그대로 남아 있다. 이는 모듈화 공법이 적용된 것이다. 일부가 무너지더라도 전부가 무너지지 않도록 구획을 지어 놓은 것이다. 그러나 각 부문이 옆으로부터 힘을 받아야 한다. 이러한 모순 상황을 적절하게 조합 배분해 놓은 것이다. 미륵사지 탑 해체보고서상에는 탑신 내부의 공기 소통 체계에 관한 언급이 없다. 베르노이 원리에 의해 탑신 내 공기의 유통이 상존하도록한 점에 대한 검토가 없었다. 석재와 다른 석재 사이에 불순물이 자라지 못하도록 조치하는 공학이 가능하다. 석재 조립에 있어 취사선택 공학이 적용된 점을 비정해 본 것이다. 석탑은 보면 볼수록 아름답다. 처마의 솟음 각이 층이 위로 올라 갈수록 점차 줄어들고 있다. 모든 처마는 모서리에서 살짝 반전한다. 옥개석 아래에 놓이는 돌을 중층 받침이라 부른다. 세 개 단으로 된 받침돌이 5층과 6층에서는 네 단으로 한 단이 늘어난다. 옥개석 상단의 부재는 상단 탑신부를 받치는 것인데 1,2 층에서는 하나였다가, 3층 이상에서는 두 개로 늘어난다. 왜 이렇게 변화를 두었을까? 석재들이 축구장만 한 넓이에 규칙적으로 널려 있다. 각 부재의 탑신 안에서의 위치 또는 역할 등을 도면으로 설명해 준다면 어떨까? 관광객은 자아 만족을 원한다. 휴식, 힐링 등을 할 때에도 자아 만족을 위해 가치가 있는 것이라면 더욱 관심을 가지게 된다. 문화해설사의 역할이 상당하다. 인문학과 공학이 함께 융합을 할 수 있다면 더욱 좋을 것이다. 인문과 공학의 백그라운드가 튼튼하였으면 한다. 토목공사가 벽안시 당하고 조롱 당하고 있는 세대에 살고 있다. 관광객들에게 최소의 자원을 이용하는 고대 토목공사의 설계 개념 등을 설명하였으면 한다. 부재 하나 하나마다 후세에 전하는 메시지가 있다. 고대사에 대한 애착을 가지는 계기가 될 것이다. 지혜를 얻게 된다. 지역경제 살리려고 지역 관광을 촉진 시킨다. 익산시의 역투는 현재 진행중이다. 익산시의 도전에 격려의 박수를 보낸다. 문화해설사는 백범 김구의 내가 가지고 싶은 우리나라, 문화국가 부분을 암송한다. 라스트 멘트다. 이 부분은 책을 읽으면서 눈물이 나온 몇 안되는 경험을 가지고 있다. 같이 간 사람은 귀에 잘 안 들어 오는 듯하다. 백범일지 책을 이야기를 해 주었다. 그 책을 찾기에 구해다 주었다. 기차 안에서 읽겠다고 한다. 문화의 힘이 자라는 순간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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선생님우리가 사는 동안 주변에 선생님들은 항상 계신다. 세 살 짜리에게도 배울 것이 있다고 했으니 누구나 선생일 수 있다는 말이기도 하다. 방학 동안 열심히 파크골프장을 따라 다닌다. 내가 권해서 시작하게 된 막내 동생이 방학을 맞아 열심히 나를 데리러 오기 때문이다. 북천에 파크골프 클럽이 생기면서 진교구장에 속해 있던 나도 북천으로 옮겨오고 동생도 가입하게 했다. 소속이 없이 하면 매일 구장 사용료도 내야하고 여러 가지 번거로운 일들이 많아 함께 클럽에 가입시켰다. 방학이후엔 시간이 나지 않고 주말이라도 올 수 있을지 알 수 없지만 방학 동안이라도 함께 다닐 수 있으면 좋겠다고 생각해서였다. 그러나 하루도 쉬지 않고 아침 일찍 나가자고 하니 추운 날은 힘들기도 하다. 북천에 파크골프장이 없어 북천면사무소에서 만나 함께 횡천의 파크골프장으로 이동한다. 작년에 멀리 있는 친구의 권유로 시작했지만 운동 파트너도 가까이 없고 내가 사는 북천은 구장이 없어 자주 나갈 수가 없었다. 제대로 배우지도 못한 채 친구와 몇 번 타지역의 유명한 구장을 여행 삼아 가보면서 더 흥미가 생겼다. 갑자기 파크골프 인구가 늘어나는 바람에 제대로 이론이나 실기교육을 받기도 힘이 들었다. 늘어나는 수요에 비해 구장은 모자라고 가끔 타지역으로 가면 눈치가 보여 자유롭지 못하고 기다리는 시간이 많아 즐거움이 반감되기도 했다. 그러던 차에 북천에 클럽이 생겨 반가웠다. 회원 수도 많고 호응도 좋아 횡천구장 출입이 빈번해지고 단체톡방에서 서로의 안부를 전하기도 한다. 겨울 아침은 서리로 차갑다. 9시 전에 도착하면 무서리가 내려 반짝거리는 구장이 우릴 반기지만 다행스럽게 일찍 오는 한 팀이 있다. 부부인듯한 그들은 이른 시간을 정해놓고 다니는 듯하다. 우리가 도착할 즈음 그들은 멀리 구장 가운데쯤 있는 걸 보면 우리보다 30분은 더 일찍 온 것 같다. 그 시간 얼어있는 잔디구장은 공 구르는 소리가 데굴데굴 나고 예상보다 멀리 달아나기도 한다. 언 손을 호호불고 볼이 빨갛게 얼어도 홀 인 하는 재미로 열심히들 하고 있다. 대부분은 장갑은 물론 계절에 상관없이 눈만 보이도록 얼굴을 가리는 것이 보통이다. 안경을 낀 나는 마스크 하는 걸 불편해하는 편이다. 불편하기도 하고 얼굴이 햇빛을 보는 게 그렇게 문제가 되어야 하나 싶기도 하다. 썬크림이라도 챙겨 바르면 되지 않을까 싶기도 하고. 대부분의 시간을 둘이서 돌지만 주말이 되면 구장은 외부 사람들로 붐빈다. 그럴 때면 어쩔 수 없이 네 명씩 팀을 이루어 나가야한다. 기다리는 사람 없이 게임의 원활한 진행이 필요하기 때문이기도 하다. 혼자오거나 혹은 둘이 온 사람들과 맞추어 나가면 둘이서 하는 것보다 배울 점들이 많다. 겨울은 농촌에서는 쉬는 계절이다. 그래서인지 오전에 나오셔서 몇 시간 점심 식사 후 몇 시간 구장에서 지내시는 가까이 사시는 분들이 많은 것 같다. 그 분들은 구장의 특징을 너무나 잘 알고 계신다. 티샷은 어느 곳을 향해 쳐야하고, 홀인을 하기 위해서 어느 쪽으로 볼을 보내야 하는지 설명해 주신다. 어릴 적 구슬치기를 하듯 신나하시는 모습들이 보기 좋다. 연세가 드셔도 건강하고 행복하게 지내시는 분들이 많아 파크골프 구장에 가면 건강한 어른들이 많이 계신다. 반면에 젊은 친구들도 많이 시작해서 가끔 예쁜 골프복을 차려입은 모습들도 보인다. 우리와 함께 있는 중에 홀인원을 하신 분은 다반사인척 하시지만 해맑게 웃으시며 자랑스러워하시는 모습이 귀여우시다. 건강한 모습의 노년은 보는 사람들마저 건강하게 만드는 선생님들이시다. 벚꽃 핀 구장의 모습을 떠올리며 행복해하는 동생을 물끄러미 바라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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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고하초등학교짙은 파란색 2층 건물에 좁은 창문이 다닥다닥 붙어있다. 현관은 3층으로 이어져 옥상에서 사방을 살필 수 있는 전망대의 모양이다. 창문이 닫혀 자유스런 학교의 분위기와 사뭇 다르다. 넓은 마당은 잔디와 나무로 조경을 하였고 사이사이 산책로를 열어놓았다. 좌측으로 소녀상이다. 리본을 두른 챙 넓은 모자의 오른쪽 뒤를 눌러 왼쪽 얼굴의 이마까지 열렸고 귀를 덮은 머리를 양쪽으로 내렸다. 오뚝 솟은 코끝은 세월에 맡겨 떨어져 나갔고 상체는 가늘다. 무릎 위에 두 손으로 책을 펼쳤고 신을 벗은 왼발을 오른발 무릎에 얹었다. 하단에 ‘독서는 마음이 양식’이라는 동판을 볼 수 있다. 조금 떨어져 대리석 직육면체 위에 자연석을 세우고 세로글씨로 ‘고하초등학교 옛터’를 깊게 새겨 무궁한 세월 동안 유지되겠다. 하단 중앙 오석에 가로글씨로 〈배움의 옛터. 이곳은 유서 깊은 고하의 옛터에 자리 잡은 고하초등학교 옛 터전입니다. 개교 이래 반세기 동안 힘써 배우고 몸과 마음을 닦아온 우리들의 영원한 고향입니다만 급변하는 사회로 취학 어린이 감소를 가져 왔고 국가 시책에 따라 고전초등학교로 통폐합되었습니다. 고하 2500여 동문 여러분! 정든 교정에서의 천진난만한 꿈은 자랑스러운 고하인으로 자라나 이제 이 나라의 동량재로서 그 직분을 다하고 있습니다. 어린 시절 우리들이 마음껏 뛰놀았던 배움의 옛터를 영원히 기리기 위하여 이 기념비를 세웁니다. 고하초등학교 카페주소: http://cafe.daum. net/GoHa. 2010년 4월 25일 고하초등학교 동문 일동〉. 카페주소를 기록한 것은 오늘을 바로 보고 앞을 내다보는 지혜로움을 엿 볼 수 있겠다. 뒷면에는 (구)고하초등표지석 협찬 명단을 ‘9회 차정홍 부터……25회 김복순’으로 중간에 1회 및 32회 등의 명단도 보인다. 이름으로 마감한 것은 동문들의 일체감을 보여준다. 고인돌을 보기 위하여 이리저리 걸음을 옮기면서 살펴본다. 흙으로 돋우고 잔디를 심고 여기저기 여러 종류의 나무를 심었다. 정자를 세웠고 주변에 장독대를 진열하여 마음 편하게 걷다가 앉아 쉴 수 있게 하였다. 미루어 보건대 운동장을 공원으로 꾸미고 교실을 새로운 용도의 건물로 꾸민 것으로 짐작된다. 멀찍이 남새밭에 흔한 바위 하나 볼 수 없다. 교통이 불편하던 시절 사택에 교장이나 먼 거리 교사들이 생활하였다. 남새밭에 채소를 심어 반찬거리로 사용하였을 것이다. 오른쪽 구석에 숙직실로 사용되었을 집이 있다. 마당은 잡초로 무성하고 울타리는 없지만 범의 석고상이 있다. 운동장 조례대 옆 화단이 정위치 이련만 이곳에 있다! 시멘트 받침대에 범의 발은 고정되었는데 평평한 바위 위에 놓여 옮겨 놓은 것으로 볼 수 있다. 머리는 쳐들고 눈에는 안광이 뿜어 나오고 입은 벌려 호흡을 조절하고 오른쪽 앞발은 앞으로 내밀고 뒷발을 숙이고 꼬리를 아래로 늘어뜨렸다. 주변 상황을 살피면서 살금살금 접근하다 덮칠 기세이다. 뒷발 앞에 ‘증 82년 입학기념’이라는 표지석이 있다. 입학 기념으로 기증은 아주 드문 경우이다. 입학과 동시에 6년 동안 보고 만지고 느끼며 배워나가는 앞을 내다보는 값진 학습 자료가 될 수 있겠다. 1982년 입학생은 아마도 범띠가 아닌지! 눈길을 끄는 바위가 있다. 범의 석고상 옆에 검은 색의 반원모양 기둥 바위가 엎어져 있다. 직경은 3보, 길이는 5보 정도이다. 보고 둘러봐도 예사롭지 않다. 이것이 입으로 전해오는 고인돌인가! 건물을 지을 때 멀찍이 옮기거나 부셔버려도 되겠는데 존재감을 보인다는 것에 가슴이 뛰었다. 확인을 위하여 현관문을 두드리자 직원이 노인요양원이라 외인출입금지 구역이란다. 고인돌에 대하여 문의할 것이 있다고 하자 이 학교 출신의 여직원을 불러준다. 학교에 고인돌을 보거나 듣지 못했단다. 한참을 생각하더니 “고인돌은 몰라도 개구리 바위는 있다.”면서 그 바위로 안내하더니 올라가 놀았다고 기억을 되살린다. 맞은편 산 이름이 뭐냐 묻자. 노인들이 노적가리처럼 생겨 소오산이라 한단다. 소녀상 뒤쪽에 쇠파이프 기둥을 세우고 철사로 그물로 엮고 등나무를 올렸다. 가지가 얽혀서 짙은 그늘아래 의자에 앉아 더위를 피할 수 있겠다. 기둥에 몇 겹의 등나무 줄기가 감고 감아 기둥이 보이지 않지만 기둥이 없으면 그렇게 되지 못했겠지. 동문들이 끌어주고 밀어주는 모습을 보는 듯하다. 고인돌은 볼 수 없었지만 입학과 동시에 보고 배우는 입학 기념물을 마련하였다. (구)고하초등학교 표지석 협찬자에 금액을 제외하고 접수순으로 기수와 성명을 기록하였다. 카페주소를 소개하여 동문의 결속과 어울려 살아가는 모습을 볼 수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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쓴소리와 아부의 패러독스대부분 사람은 쓴소리보다 칭찬을 좋아한다. 쓴소리를 싫어하고 피하고 싶은 것은, 범인(凡人)에게 인지상정이다. 실제로 세상 살다 보면 쓴소리하는 것보다, 그냥 칭찬을 해주거나, 윗사람에게는 MSG를 첨가한 아부를 하는 것이 편하다는 것을 본능적으로 깨닫게 된다. 쓴소리하기가 쉽지 않은 것은 쓴소리하려면, 나름의 논거와 논리가 정연해야 한다. 왜 쓴소리하는지에 대한 합목적성과 보편적 가치를 말하기 위해서는 생각해야 하고 상대를 설파할 수 있는 기승전결이 명확해야 한다는 것이다. 이와 함께 쓴소리는 상대가 듣기는 불편하지만, 반드시 상대에게 도움이 되는 대안을 포함해야 하는 만큼 말을 꺼내는 것이 쉽지 않은 데다, 골치 아픈 것을 싫어하고, 번거로운 것을 피하고, 싶은 현대인에게 어쩌면 쓴소리보다 차라리 아부를 선택하는 것이 훨씬 수월하고 생산적인-자기에게 이익이 되는-것으로 판단하게 된다. 또 쓴소리하더라도 ‘내가 쓴소리하면 기분 나빠하지 않고 받아들여 개선할 가능성이 있는 사람’에게 자신의 생각을 이야기하지, 애초부터 들으려 하지 않거나 말해도 아예 개선할 가능성이 없는 사람에게는 입을 꾹 닫게 된다. 평범한 일반인의 경우 쓴소리를 싫어하고 자기가 편하게 느껴지는 사람을 골라 만나도 딱히 큰 문제는 없다. 하지만 사회적 직위가 있고 리더십을 발휘해야 하는 지도자가 쓴소리를 싫어하고 아부성 칭찬에 빠지게 되면 먼저 본인의 실패는 물론 그 리더가 맡고 있는 조직 전체에도 여러 문제와 함께 심각한 피해가 발생하게 된다. 이러한 폐해를 알고 있음에도 우리 사회에 있는 크고 작은 모임이나 조직의 리더들은 쓴소리보다 아부와 아첨을 좋아한다. 비범한 리더의 경우 어떤 말이 자기에게 보약이 되고, 어떤 사람이 아부와 아첨하는지를 쉽게 가려낼 수 있으나 아부, 아첨꾼들 또한 리더의 이성을 마비시키는 능력이 탁월한 까닭에 이마저도 쉽지 않다. 조직의 리더들은 아부꾼이 마음에도 없는 접대성 아부를 해도 그런 사람들이 대개 윗사람의 눈에 들게 되고, 인사고과를 잘 받아 승진도 빨리하는 것이 조직 세계의 공식처럼 되어있다. 사전적 의미로 ‘남의 마음에 들려고 비위를 맞추며 알랑거리는 것’을 ‘아부’라고 한다. 아리스토텔레스는 '돈이나 돈으로 살 수 있는 것에서 이득을 보려고 기쁘게 해주는 사람'을 아첨꾼이라고 했다. 세상 살다 보면 의외로 아부·아첨하는 사람을 쉽게 보게 된다. 아부의 이면을 들여다보면 반드시 ‘개인의 이익’이 들어 있다. 그 이익이 재화일 수도, 권력이나 명예일 수도 있다. 지금 당장은 아니지만 장래 발생할 잠재적 이익을 위해 아부를 투자하는 것일 수도 있다. 실제 아무런 대가도 바라지 않고 순수(?)한 마음으로 아부하는 경우는 없다고 봐야 한다. 간혹 아부와 아첨을 싫어하는 리더도 있지만 그렇더라도 아부하는 사람이 일 잘하고 실력 있는 사람이라면 십중팔구 그 리더도 아부와 아첨에 혹할 개연성이 농후하다. 아부를 싫어하는 리더는 대개 ‘실력’을 우선하는 경우가 많고 실력 있는 아랫사람이 아부를 한다면, ‘아부’를 ‘아부’로 듣지 않고 진심에서 우러나는 ‘칭찬’으로 들을 가능성이 아주 높기 때문이다. 사실 ‘아부’와 ‘칭찬’을 구분하기가 쉽지는 않다. 딱 분질러 이것은 ‘아부’이고 저것은 ‘칭찬’이라고 정의하기에는 경계가 모호하다. 개인의 관점에 따라 달라질 수 있으나 그래도 그 사람 말에 진정성과 애정이 담겨 있고, 제삼자가 들어도 귀에 거슬리지 않는다면 ‘칭찬’으로 봐도 무방하다. 바꿔 말하면 마음에도 없는, 건성으로 칭찬한다면 그것은 ‘아부’라고 봐야 한다는 것이다. 이 시점 우리는 스스로 돌아볼 시간을 가지는 것도, 좋을 듯하다. 자기가 조직이나 모임의 리더가 아니라도 “나는 쓴소리를 잘 받아들이는 사람인가‘를 생각해 보는 것도 나쁘지 않다. 지금 당장은 자신이 리더나 지도자가 아니더라도 본의든 본의 아니든 리더가 될 기회는 언제든지 상존하기 때문이다. 만약 내 주위에 쓴소리를 해주는 사람이 없다고 느낀다면 그 사람은 이미 자기만의 세계에 점점 고립되거나, 고립되어 있는 상황일 수도 있다. ’세상에는 완벽한 사람이 없다‘는 것을 전제할 때 자신에게 쓴소리하는 사람이 없다는 것은, 남들로부터 외면받고 있는 징표일 수도 있다는 것이다. 쓴소리하는 사람이 없다는 것은 본인이 쓴소리 듣는 것을 싫어하고, 쓴소리를 하면 화를 내기 때문일 것이다. 역설적으로 쓴소리를 싫어하는 사람은 아부와 아첨을 좋아한다는 공통점이 있다. 마키아벨리는 군주론에서 “군주가 쓴소리를 싫어하면 아첨꾼만 남는다”고 했다. 아부와 아첨하는 것은 사실 아주 간단하다. 특정 사안을 놓고도 힘들게 연구하고 어렵게 고민할 필요가 없다. 듣는 사람이 싫어할 만한 것은 쏙 빼고, 좋아할 것들만, 주저리주저리 호들갑 떨며 말하면 된다. 쓴소리도 마다 않는 정상적인 사람이면 ”사장님이 말씀하신 A 사안은 이러이러한 문제점을 노정할 수 있고, 그와 같은 문제점을 미연에 방지하기 위해서는 다음과 같은 대책을 세워 추진하는 것이 좋을 것 같습니다.“라며 사전 사후 대책을 마련하여 보고하지만, 리더가 쓴소리를 싫어하고 아부, 아첨을 좋아하면 ”아무 문제 없이 잘 돌아가고 있습니다.“, ”주변에 사장님에 대한 칭송이 자자합니다“, ”말씀하신 목표는 거뜬하게 달성될 것 같습니다“와 같이 리더를 영혼 없이 추켜세우는 알랑방귀의 귀재들이 득세하게 된다. 리더가 가장 경계하고 삼가야 할 것이 ‘아부와 과잉충성’이다. 리더가 쓴소리를 싫어하고 아부와 칭찬을 좋아하면 자연스레 ‘과잉 충성’을 부르게 된다. 과잉 충성은 뇌세포를 단세포로 만들어 이성을 마비시킨다. 옳은 것을 보지 못하고, 밝은 길을 찾지 못하게 하는 사약과도 같은 존재다. 동서고금의 역사를 봐도 아부와 아첨으로 포장된 과잉 충성이 세상을 어지럽히고 심지어 나라의 문을 닫게 하는 사례는 숱하게 많다. 과잉 충성을 일삼는 아첨꾼은 ‘계산의 천재’라는 중요한 특질을 가지고 있다. 영전, 권력, 부귀영화로 가는 방정식을 계산하는 능력은 타의 추종을 불허한다. 자기에게 이익이 있다면 자신이 모시고 있는 리더가 설사 잘못된 길을 가더라도 벼랑 끝으로 길을 안내한다. 끊임없이 그 길이 옳은 길이라고 주술하며 나락의 길로 몰고 간다. 홀리는 언설(言說)과 교언영색(巧言令色)에는 남다른 재주가 있어 빠져나오기도 쉽지 않다. 리더의 권력이 크면 클수록 이런 자들에 의한 비극은 자주 발생한다. 총애와 신임을 무기로 끊임없이 문제를 일으키는 사례가 허다하다. 아부와 아첨 그리고 과잉 충성이 활개 치는 이면에는 잘못된 우리의 정치문화와도 밀접한 관계가 있다. 권력의 향배에 따라 신념과 절개는 헌신짝 버리듯 내팽개치고, 카멜레온적 변신만이 살아남은 역사적 교훈(?)을 아부, 아첨꾼들은 잊지 않고 있기 때문이다. 과잉 충성의 이면에는 반드시 라고 할 만큼 배신의 그늘이 드리워져 있다. 과잉 충성을 일삼는 아첨꾼들은 출중한 계산능력을 가지고 있기에 새로운 권력자가 나타날 낌새가 보이거나, 나타나면 곧장 지금까지 관계를 맺어 왔던 끈 떨어진 리더를 버리고 주판을 튕기며, 밀거래를 시작한다. 리더가 쓴소리를 싫어한다는 것은, 스스로 아첨꾼을 부르는 것이고, 과잉 충성을 조장하는 것이다. 결국 화를 자초하는 길일 수도 있다. 동서고금의 역사가 증명하고 있다. 아부와 배신은 비례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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벌써겨울비가 내린다. 얼었던 것들이 녹는다. 마당 가운데 놓여 있는 큰 통에 담긴 빗물은 날씨에 따라 얼음이 얼었다 녹았다 한다. 조금 더 추운 날은 두껍게, 덜 추운 날은 얇게 얼려 그 날을 연출한다. 비가 내리면 화단 주변에 떨어진 나뭇잎들로 온 마당이 을씨년스러워진다. 잠깐 비가 멈춘 사이에 키가 큰 비로 눈에 띄는 곳이라도 비질을 해본다. 녹은 흙은 부드럽고 비에 젖은 나뭇잎을 치우기가 쉽지 않다. 장갑 낀 손으로 나뭇잎을 줍던 나에게 인사를 건네는 작은 것들이 있다. 수선화다. 1월 초에 소한이 지나고 엊그제 대한이 지났다. 그러나 봄은 아직 멀었는데… 이 철없는 녀석이 벌써 싹을 틔웠다. 괜찮을까. 걱정스럽다. 수선화의 출현으로 여기저기 화단을 살피기 시작한다. 겨울 지나 찾아 올 꽃샘추위도 남았는데… 목련도 추위 속에 당당하다. 봉우리 끝에 털을 내어 봉우리 안을 보호하고 있는 듯하다. 알프스민들레도 눈치 보지 않고 자신의 자리를 넓히고 있는 중이다. 몇 포기 얻어다 싶은 상추도 얼었다 녹았다 하면서 그 자리를 지키고 있다. 비에 뿌리를 조금 드러낸 백합도 건재하다. 대문을 열고 밖으로 나가려고 하는데 대문이 열리지 않는다. 방부목과 철로 만든 대문은 내 키보다 크다. 한참을 잡고 씨름을 해보아도 결국 허탕이다. 철로 만든 것들에 빗물이 묻고 그것들이 얼어서 힘이 세어진 모양이다. 몇 번을 밀어 보았으나 얼음이 녹기 전에 열기는 어려울 것 같아 다시 돌아 들어온다. 대문에 심어 아치로 올린 개나리쟈스민을 가까이서 보려했는데 텃밭으로 들어가 울타리 사이로 바라본다. 작은 잎들이 추위에도 파랗다. 낮은 담장에 피어 있는 핑크빛 찔레도 푸른 잎을 달고 봄을 기다리고 있다. 수국도 딱딱한 가지 사이로 조그만 눈들을 달기 시작했다. 기다리면서 또 참아가면서 자신이 해야 할 일들을 묵묵히 하고 있는 자연을 바라보면 닫혀 있던 마음이 삐끔 열리기 시작하고, 좁기만 하던 마음의 언저리가 조금씩 넓어지는 것이 느껴진다. 사람이 만든 대문은 얼어서 열리지도 않지만, 자연은 언제나 열려 있어 어떤 모습의 우리든 기꺼이 맞아준다. 가을에 수확하지 못하고 넘긴 돼지감자를 며칠 전 수확했다. 그대로 두면 너무 많은 싹들이 돋아나서 온 밭을 채울까 걱정스럽기도 하고, 당뇨에 좋다는 친구의 말이 생각나기도 해서였다. 가을에 전부 수확하지 않아도 다음해 3월까지 묻어 둔 채로 조금씩 수확해서 사용해도 된다는 사실을 이번에 알았다. 파나 무를 땅에 보관하는 것처럼. 크기가 큰 것들은 씻거나 자르기가 쉽지만 마늘쪽만큼 작은 것들은 자르기도 씻기도 힘이 들었다. 작년에 장만하지 않고 보낸 돼지감자로 아픈 친구에게 일거리만 보탠 것 같아 미안한 마음이 들었다. 한꺼번에 하지 말고 조금씩 장만하여 모았다가 친구에게 보낼 생각을 하니 즐거운 마음이 든다. 내 텃밭의 것을 수확하여 내 손으로 장만하고 마음까지 담아 보낼 생각이다. 당뇨수치가 낮아졌다는 톤이 높아진 친구의 목소리가 들리는 듯하다. 수선화의 인사로 갑자기 바빠진 아침, 해가 뜨면 대문의 빗장을 열고 마당 가득 햇빛과 바람으로 채워보리라. 수선화를 좋아하는 손녀 희연이가 이번 주에 온다고 했지. 꽃이 피기 전 모습을 보여준다면 무슨 말을 할까? 세 살이나 되었을까, 그 봄에 갸우뚱한 고개로 수선화에게 인사를 건네던 아이의 모습이 내 사진첩에 남아 있는데. 초등학생이 된 지금은 어떤 표정으로 꽃이 피지 않은 수선화에게 인사를 건넬까 사뭇 궁금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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번개 불에 에이아이 볶아 먹는 요즈음새로운 에이아이(AI) 서비스가 나올수록 더욱 필요한 것이 있다. AI 서비스를 받거나 이용하는 쪽, 사용자가 제대로 치고 나가야 한다. 20여 년 전, 미국 동부 유명한 대학에서 한 학기 동안 홈페이지를 만들어 돈을 벌게 하는 과목이 있었다. 교수는 한 학기 동안 학생들이 하는 것을 지켜만 보고 있다. 질문에 답하는 수준이다. 학기 말 평가가 있었다. 학생 각자가 얼마를 벌었는지 체크 했다. 학생들이 벌어드린 돈의 최대와 최소는 100배 차이로 벌어졌다. 교수는 제일 많이 번 학생에게 질문한다. 무엇으로 벌었냐? 골프채를 팔았다고 한다. 교수는 이 학생에게 최고 점수를 주었다. 교수는 기술을 아는 것 보다 이 기술로 무엇을 할 것인지를 판단하는 것이 더욱 중요하다고 말한다. 이달 말 출시될 예정인 삼성 S24 휴대폰에 자동번역기가 내장되었다. 핸드폰은 비행기 안에서는 비행 모드로 바뀌어야 한다. 인터넷이 꺼진 상태가 된다. 이번 새로 출시되는 폰은 인터넷으로 온라인이 안 되어도 자동번역기는 작동한다. 13개국의 말과 문자로 통역·번역해준다. 스페인어를 중국어로도 통역한다. 학부모들을 고민하게 만든다. 통역이 이쯤 되는데 이제부터는 영어 공부 안 해도 되는 것 아니냐는 아이들의 질문이 쇄도한다. 현재 AI 번역 품질은 중학생 수준이다. 완벽하지 않다. 나만의 마음 속 속사정을 정확하게 표현 못 한다. 상담을 통해 경쟁 상대자와 경쟁을 해야 하는 순간 등의 환경에 마주쳤을 때, AI 번역기에만 의존할 순 없다. 영어는 의사소통이 원활할 때까지 숙달해야 한다. 살아 있는 대화를 위해, 공감의 폭을 넓히기 위해 시선을 서로 교환하기도 하며 마주한다. 이러한 훈련을 영어 학습을 하면서 함께 익힌다. AI가 통역한 것을 바로 잡는 묘미도 맛볼 수 있다. 상대와 동일한 감정 선상임을 연출할 수 있다. AI 서비스들 때문에 영어를 더욱 효과적으로 학습할 수 있게 되었다. 최근 1년 이내에 챗지피티(GPT)가 세상을 흔들고 있다. 앱으로 서비스되면서부터 일반인에게 알려지게 되었다. 유료와 무료 두 종류로 서비스되고 있다. 묻는 말에 대답한다. 질문을 제한적이며 구체적으로 잘하면 돌아오는 답의 내용도 좋아진다. 챗GPT가 최근 새로운 서비스를 출시했다. AI 서비스 앱을 위한 플랫폼을 만들었다. AI 앱을 만들어 인터넷상에 걸어 놓으면 된다. 가장 중요한 것은 무엇을 만들 것인가 이다. 분야와 용도를 선정한 후, 자신이 모아둔 관련된 자료들을 학습시킨다. 관련 분야에 전문 학습된 AI 앱이 세상에서 가장 특화된 앱인 것이다. 유료로 판매할 수 있다. AI 서비스 플랫폼 회사는 각자가 만든 앱을 위한 자료를 공유하게 된다. 유료화한 판매 대금도 일정 비율로 배분 받게 된다. 4차 산업화 영향과 AI 때문에 직간접으로 해고당할 수 있다. 해고의 한 측면은 고정 급여가 끊긴다는 측면이 있지만, 한편으로는 AI 앱을 만들어 세상을 상대로 앱을 팔 수 있는 창업 기회를 얻게 된다. 무엇을 할 것인가 판단이 중요하다. 전문 코딩 기술을 필요로 하지 않는다. 노 코딩 세상이 왔다. 한글을 닮았다. 똑똑한 사람은 반나절 만에 익혀 앱을 만들 수 있다. 발 빠른 사람들은 벌써 AI 앱을 만들어 인터넷에 올려놓았다. 비싼 건 오 백만원짜리도 있다. 에스앤에스(페북, 인스타그램 등)에 어떻게 새로 탄생한 AI 앱을 알릴 것인가를 고민해야 한다. AI에 피해자가 될 것인가? AI로 돈을 버는 자가 될 것인가? 선택을 하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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왕비샘과 완사천왕비샘 안내판 앞에 섰다. 〈금오산에서 뻗어 내려온 신덕마을의 웃담 남쪽 기슭에 조그만 샘이 있다. 옛날 어느 왕이 이곳을 지나다가 몹시 목이 갈해 물을 긷고 있던 처녀에게 물을 청하니 처녀는 물을 한바가지 떠서 버들잎을 훑어 넣어 왕에게 주었다. 왕은 이상히 여겨 왜 버들잎을 넣느냐고 물으니 처녀가 목이 마른 상태에서 급히 물을 마시게 되면 몸이 상할까 염려되어 그렇게 하였다고 대답하였다. 왕은 기특하게 생각하고 후일 그 처녀를 불러 왕비로 삼았다〉. 한적한 곳에서 대하는 안내문은 상상의 날개를 펼치게 한다. 그 왕은 과연 누구일까? 조선시대는 일부일처제로 1인의 왕비에 다수의 후궁 또는 첩이 있었고 고려시대 왕실은 일부다처제로 29명의 왕비를 거둔 태조 왕건이 아닐까? 왕비샘과 유사한 설화로 나주 완사천(浣紗泉)이다. 왕비샘은 우리말 ‘샘’으로 완사천은 ‘泉(천)을 시용하고 있다. ‘샘’은 물이 땅에서 솟아 나오는 곳 또는 그 물이다. 한자 泉은 우리말 뜻은 ‘샘’이요 음을 ‘천’으로 옮긴 것으로 물줄기가 시작되는 곳을 나타내는 중국의 문자이다. 완사천의 浣은 ‘빨 완’이고 紗은 ‘비단 사’이다. 왕건이 궁예의 수군장군(水軍將軍)으로 나주에 와서 목포(나주역 일원)에 배를 정박시키고 물가 위를 바라보니 오색구름이 서려 있어 신기하게 여겨 가보니 아름다운 처녀가 우물가에 빨래를 하고 있었다. 물 한 그릇을 청하자 처녀는 대범하게 바가지에 물을 떠 버들잎을 띄워 건넸다. 급히 물을 마시면 체할까! 하여 천천히 마시도록 한 것이다. 왕건은 처녀의 총명함에 끌려 여인을 아내로 맞이하였다. 장화왕후 오씨 부인이고 아들 무(武)가 고려 2대 왕에 오른 혜종(惠宗)이다. 장화왕후는 나주에서 대대로 소금을 생산하던 호족 오다련의 딸이다. 이곳은 서라벌과 당나라를 연안 항해로 오갈 때 반드시 지나는 길목인데다 서해안에서 내려올 때도 만나는 교차점으로 상업에 유리한 지역이었다. 오다련은 신라 6두품 연위의 사위가 된 것에서 지방 세력자로서 위세가 상당했음을 알 수 있다. 완사천은 나주 시청 앞 300m 지점, 국도 13호선 주변에 있는 옹달샘으로 아무리 가물어도 마르지 않았다. 태조 왕건과 장화왕후 오씨의 만남을 기념하는 조형물과 기념비가 세워져 있고 전라남도 기념물로 지정하여 널리 알리고 있다. 왕건 부인들을 출신지별로 분류하면 황해도 9명, 경기도 4명, 강원도 3명, 충청도 3명, 경상도 6명, 전라도 2명, 지역 미상 2명이다. 특히 경기도 광주의 광주원부인 왕씨와 소광주원부인 왕씨, 동주의 소서원부인 김씨와 대서원부인 김씨는 친자매였다. 완사천 오씨부인과 왕비샘 처녀의 ‘물바가지에 버들잎을 훑어 넣어 왕에게 주었다’는 총명함은 대등하다. 《고려사 왕비열전》 등의 문헌을 조사하면 왑비샘의 전설은 사실로 밝혀질 것이다. 신덕마을은 금오산 산록 동남쪽에 산이 둘러쳐져 마을을 내려다보며, 낮은 산 좁은 골로 이어지고 정마산 앞산(안산)이 마을을 안아주고 1950년대 작은 골, 중간 땀, 아래 땀, 굼텅 몰, 열 두 모퉁이에 살고 있었으나, 지금은 아래 땀에만 집이 있으며 여타 곳은 흔적조차 찾아볼 수 없다. 신덕마을은 1914년 행정개편에 성평리 신덕으로 되었고 1965년 성평리 산 90번지 ‘바위안’이라는 곳에서 금동여래입상 1점, 수불동에서 금동보살입상 1점, 석경 1점 및 고려자기가 출토되었다. 문경 송씨와 충주 지씨 등이 살았다. 한다사 성립과 그 연원을 역사적으로 같이 하며 불교문화가 화려했던 곳이다. 고개 너머에 하동포구로 연결되는 주교장터가 있었다. 가야국, 백제, 신라, 중국, 일본과 교역의 남해안 중심지로 많은 사람이 모였다. 은밀히 당고종을 만나려 가는 김춘추도 포함되어 있었던 것이다. 왕비샘의 그 처녀는 왕권강화를 목적으로 왕건이 순행을 하다가 만난 이 지역 실권자의 딸이 아닐까! 왕비샘 위쪽 밭 귀퉁이에 거처를 마련하고 산다는 송씨와 이야기를 나누었다. 집이 있었던 자리가 밭이 되었지만 8남매가 살았다. 동생들은 공부하러 타지로 나갔고 장남이라 부모님을 모시고 남았다. 객지 생활하다 귀향했다 한다. 왕비샘을 수리하다 바닥에서 굵은 나무토막을 발견했다. 요모조모 살펴보니 수양버들 뿌리라 왕비샘 전설이 사실로 밝혀지게 되었단다. 참게가 올라와 살았는데 물길을 돌리자 샘물이 졸아들어 기어 나오는 참게를 잡을 수 있었고 근방에서 유일하게 백운산을 볼 수 있는 명당이란다. 건너편에서 금동불상 등이 나왔고 소먹이면서 뛰고 놀던 거대한 고인돌이 있었다 한다. 고인돌에 관심을 보이자 “그래요, 옛 고하초등학교를 찾아보시죠!”